하나님의 뜻을 더 중시하는 사람이 쓰임받는다(삿4:1-10,17-21)
▶이라크전쟁이 터지기 몇 년전 미국의 한 여기자가 이라크의 남녀간 역할에 관한 글을 쓰고자 이라크를 방문하였다. 그때 보니 여자들은 의례 남편들보다 10미터쯤 뒤에 처져서 걷고 있었다. 여성의 대우가 좋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자가 이라크전쟁이 끝나고 최근에 수도 바그다드를 다시 찾게 되었는데,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부부가 길을 갈 때, 남자들이 아내들보다 몇 미터 뒤에 걷고 있는 것이다. 여성이 우대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기뻐한 여기자는 한 여성에게 다가가서 여성의 대우가 달라진 까닭을 물었다.이라크여성의 대답은 “그게 아니라,'지뢰'때문이라는 것이다. ==> 전쟁후 지뢰가 많기 때문에 여자를 먼저 앞으로 보내는 것이다.
중동지방과 북아프리카에서는 아직도 여성이 무시당하고 있다. 전세계 여성중 4억 5천만명 정도가 남자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고 있다. 만약 여러분의 남편이 그러면 그걸 가만 놔두겠는가? 오늘날 여성이 무시당하는 나라를 살펴보면, 성경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들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고 교회가 세워진 국가에서는 여성들이 대우받는다. 그러나 성경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들에서는 여성들이 학대를 당하며 살고 있다.
중동에는 "명예살인"이라는 것이 있다. 자기 가문에 해가 되는 일이나 명예를 해치는 일을 한 여자들을 죽이는 것을 명예살인이라고 한다. 그저 자기 딸이나 누이와 관련되어 안좋은 소문이 나면, 아무 증거도 필요없이 자기 딸과 누이를 죽인다. 그것도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산채로 화형을 시키거나 염산을 뿌려 죽인다. 중동 어느 국가에서는 매년 350명의 여성이 명예살인으로 죽어간다. 여성학대는 전세계적으로 공공연하게 일어난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그런 일을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결코 여성을 비하하지 않는다./성경에는 여성의 이름이 많이 나온다. 기생라합, 미리암, 드보라. 훌다, 브리스길라, 뵈뵈, 루디아. 등등 그들모두 하나님께 쓰임받았다. /현재 중국에는 5만개의 가정교회가 있는데 이중 4만개의 가정교회 지도자가 여성이다./인간은 여성을 차별해도, 하나님은 여성을 차별하지 않는다.
영국의 글래디스 아일워드는 학력부족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모든 선교단체에서 자기를 받아주지 않자, 런던에서부터 기차로 중국까지 갔다. 돈이 없으면 가정부 일을 해서 차비를 벌었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사이의 전쟁터를 뚫고 가서 중국선교에 크게 이바지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런 말은 성경어디에도 없다.
===> 성경이 중요시 여기는 것은, 당신이 남성이냐 여성이냐가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뜻에 더 잘 순종하느냐이다.
가나안왕 하빈이 이스라엘을 이십년간 학대하면서 괴롭히던 때, 당시 이스라엘의 사사요, 여선지자였던 드보라가 어느날 바락이라는 남성지도자를 불러, 그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하나님께서 바락에게 납달리자손과 스불론자손 일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가나안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싸우라고 하셨다. 그러면 승리를 주시겠다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바락의 대답을 보라. 8절을 같이 읽자.“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겠지만,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않으면 나는 가지 않겠습니다.”그러자 드보라는 같이 가겠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하나님께서 시스라군대장관을 여인의 손에 넘기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 여인이 누구인가? 헤벨의 아내 야엘이다. 그래서 드보라와 바락이 가서 전쟁할 때, 이스라엘이 이기게 되고, 시스라의 군대는 패하여 도망간다. 그런데 군대장관 시스라가 어디로 피했냐하면, 친분관계가 있는 헤벨의 집으로 간다. 그 집은 야빈왕과 친분관계가 있는 집이었다. 아마 야빈왕의 수하였던 시스라도 그 집과 친분이 있었던 것같다. 그러니까 어려울때 친분관계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으려고 그 집으로 도망한 것이다. 그런데 그집 아내 야엘은 시스라가 잠든사이에 그를 죽여버린다.
■ 자, 이제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왜 바락이 아닌, 한낱 가정주부인 야엘을 통해 시스라를 죽이는 영광을 얻게 하셨는가? ==> 바락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긴다고 하시면 그건 이기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바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그는 전쟁에 이기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누구를 신뢰하는가? 드보라를 신뢰하였다. 그는 말씀앞에서 인간적인 생각으로 토를 달았다. 온전한 순종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을 더 의지한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겠는가?
===> 예레미야 17장 5-8절을 찾아읽어보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락 대신에 야엘을 사용하셨다.
■ 야엘은 어떤 여자인가? 야엘은 한마디로, 인간적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더 중시한 여자이다.
시스라는 야빈왕과 헤벨의 친분관계를 믿고 그집에 자신의 몸을 의탁했다. 그런데 헤벨의 아내 야엘은 인간적 친분관계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인간적 친분관계에도 불구하고 시스라를 죽였다. 시스라입장에서는 인간적 친분관계를 믿고 간 것인데 배신당한 것이다. 아마 죽을 때, "이건 배신이야"하고 죽었을 것이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적 친분관계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적 친분관계를 중요시 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쓰임받을수 없고, 도리어 마귀의 공격을 자주 받게 될 것이다.
▶목사들이 배우는 목회학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교회안에서 목사가 어떤 성도를 크게 쓰임받는 사람으로 키우려면 목사가 그 사람과 너무 가깝게, 친근하게 지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거리를 좀 두라고 가르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성도와 목사의 관계가 너무 친근해지면, 사랑의 채찍을 쓸수 없기 때문이다. 책망할 수가 없다. 강한 훈련을 시킬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 그러한가? 강한 훈련을 시키거나 사랑의 채찍을 쓰려고 하면, 그것을 훈련으로 생각하지 않고 배신으로 느끼기 때문이다.“나하고 어떤 관계인데, 이럴수 있는가? 내가 얼마나 많이 헌신했는데 내게 이럴수 있는가?”이런 마음을 품기 때문에 훈련이 안된다는 것이다.
▶목사가 성도의 집을 심방하면 대부분 음식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어떨 때 목사는 이미 다른 집에서 너무 많이 먹어서 성도가 준비한 음식을 먹지 못할 경우가 있다. 또는 목사의 위와 장의 상태가 좋지 않아 성도가 준비한 음식을 먹지 못할 상황이 있다. 그런데 성도들은 목사가 자기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먹지 않으면 배신감을 느낀다.
“아니, 내가 이렇게 정성껏 준비했는데, 이걸 안먹어? 다른 집에서는 먹었으면서 내가 준비한 것은 안먹어? 저 목사와 나는 이제 모든 관계가 끝이야.”실제로 성도가 준비한 음식을 목사가 먹지 못함으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간 일들이 많이 있다.
===> 왜 그러한가? 배신감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학에서는 목사가 잘먹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 우리에게는 이런 연약함이 있다. 그래서 마귀가 성도를 넘어뜨릴 때 바로 이 배신감을 사용한다. 성도가 목사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하고, 목사는 성도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한다.“어떻게 목사님(저 집사님)이 나에게 이럴수가 있지?”===> 배신감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다. 배신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마음이 아니라,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다.
===> 인간적 친분관계 때문에, 인간적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라. 인간적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이 먼저이다. 인간적 친분관계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받는다.
===> 옆사람과 인사합시다.:<하나님의 뜻이 먼저입니다>
▶이라크전쟁이 터지기 몇 년전 미국의 한 여기자가 이라크의 남녀간 역할에 관한 글을 쓰고자 이라크를 방문하였다. 그때 보니 여자들은 의례 남편들보다 10미터쯤 뒤에 처져서 걷고 있었다. 여성의 대우가 좋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자가 이라크전쟁이 끝나고 최근에 수도 바그다드를 다시 찾게 되었는데,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부부가 길을 갈 때, 남자들이 아내들보다 몇 미터 뒤에 걷고 있는 것이다. 여성이 우대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기뻐한 여기자는 한 여성에게 다가가서 여성의 대우가 달라진 까닭을 물었다.이라크여성의 대답은 “그게 아니라,'지뢰'때문이라는 것이다. ==> 전쟁후 지뢰가 많기 때문에 여자를 먼저 앞으로 보내는 것이다.
중동지방과 북아프리카에서는 아직도 여성이 무시당하고 있다. 전세계 여성중 4억 5천만명 정도가 남자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고 있다. 만약 여러분의 남편이 그러면 그걸 가만 놔두겠는가? 오늘날 여성이 무시당하는 나라를 살펴보면, 성경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들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고 교회가 세워진 국가에서는 여성들이 대우받는다. 그러나 성경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들에서는 여성들이 학대를 당하며 살고 있다.
중동에는 "명예살인"이라는 것이 있다. 자기 가문에 해가 되는 일이나 명예를 해치는 일을 한 여자들을 죽이는 것을 명예살인이라고 한다. 그저 자기 딸이나 누이와 관련되어 안좋은 소문이 나면, 아무 증거도 필요없이 자기 딸과 누이를 죽인다. 그것도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산채로 화형을 시키거나 염산을 뿌려 죽인다. 중동 어느 국가에서는 매년 350명의 여성이 명예살인으로 죽어간다. 여성학대는 전세계적으로 공공연하게 일어난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그런 일을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결코 여성을 비하하지 않는다./성경에는 여성의 이름이 많이 나온다. 기생라합, 미리암, 드보라. 훌다, 브리스길라, 뵈뵈, 루디아. 등등 그들모두 하나님께 쓰임받았다. /현재 중국에는 5만개의 가정교회가 있는데 이중 4만개의 가정교회 지도자가 여성이다./인간은 여성을 차별해도, 하나님은 여성을 차별하지 않는다.
영국의 글래디스 아일워드는 학력부족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모든 선교단체에서 자기를 받아주지 않자, 런던에서부터 기차로 중국까지 갔다. 돈이 없으면 가정부 일을 해서 차비를 벌었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사이의 전쟁터를 뚫고 가서 중국선교에 크게 이바지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런 말은 성경어디에도 없다.
===> 성경이 중요시 여기는 것은, 당신이 남성이냐 여성이냐가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뜻에 더 잘 순종하느냐이다.
가나안왕 하빈이 이스라엘을 이십년간 학대하면서 괴롭히던 때, 당시 이스라엘의 사사요, 여선지자였던 드보라가 어느날 바락이라는 남성지도자를 불러, 그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하나님께서 바락에게 납달리자손과 스불론자손 일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가나안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와 싸우라고 하셨다. 그러면 승리를 주시겠다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바락의 대답을 보라. 8절을 같이 읽자.“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겠지만,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않으면 나는 가지 않겠습니다.”그러자 드보라는 같이 가겠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하나님께서 시스라군대장관을 여인의 손에 넘기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 여인이 누구인가? 헤벨의 아내 야엘이다. 그래서 드보라와 바락이 가서 전쟁할 때, 이스라엘이 이기게 되고, 시스라의 군대는 패하여 도망간다. 그런데 군대장관 시스라가 어디로 피했냐하면, 친분관계가 있는 헤벨의 집으로 간다. 그 집은 야빈왕과 친분관계가 있는 집이었다. 아마 야빈왕의 수하였던 시스라도 그 집과 친분이 있었던 것같다. 그러니까 어려울때 친분관계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으려고 그 집으로 도망한 것이다. 그런데 그집 아내 야엘은 시스라가 잠든사이에 그를 죽여버린다.
■ 자, 이제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왜 바락이 아닌, 한낱 가정주부인 야엘을 통해 시스라를 죽이는 영광을 얻게 하셨는가? ==> 바락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긴다고 하시면 그건 이기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바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그는 전쟁에 이기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누구를 신뢰하는가? 드보라를 신뢰하였다. 그는 말씀앞에서 인간적인 생각으로 토를 달았다. 온전한 순종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을 더 의지한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겠는가?
===> 예레미야 17장 5-8절을 찾아읽어보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락 대신에 야엘을 사용하셨다.
■ 야엘은 어떤 여자인가? 야엘은 한마디로, 인간적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더 중시한 여자이다.
시스라는 야빈왕과 헤벨의 친분관계를 믿고 그집에 자신의 몸을 의탁했다. 그런데 헤벨의 아내 야엘은 인간적 친분관계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인간적 친분관계에도 불구하고 시스라를 죽였다. 시스라입장에서는 인간적 친분관계를 믿고 간 것인데 배신당한 것이다. 아마 죽을 때, "이건 배신이야"하고 죽었을 것이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적 친분관계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적 친분관계를 중요시 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쓰임받을수 없고, 도리어 마귀의 공격을 자주 받게 될 것이다.
▶목사들이 배우는 목회학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교회안에서 목사가 어떤 성도를 크게 쓰임받는 사람으로 키우려면 목사가 그 사람과 너무 가깝게, 친근하게 지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거리를 좀 두라고 가르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성도와 목사의 관계가 너무 친근해지면, 사랑의 채찍을 쓸수 없기 때문이다. 책망할 수가 없다. 강한 훈련을 시킬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 그러한가? 강한 훈련을 시키거나 사랑의 채찍을 쓰려고 하면, 그것을 훈련으로 생각하지 않고 배신으로 느끼기 때문이다.“나하고 어떤 관계인데, 이럴수 있는가? 내가 얼마나 많이 헌신했는데 내게 이럴수 있는가?”이런 마음을 품기 때문에 훈련이 안된다는 것이다.
▶목사가 성도의 집을 심방하면 대부분 음식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어떨 때 목사는 이미 다른 집에서 너무 많이 먹어서 성도가 준비한 음식을 먹지 못할 경우가 있다. 또는 목사의 위와 장의 상태가 좋지 않아 성도가 준비한 음식을 먹지 못할 상황이 있다. 그런데 성도들은 목사가 자기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먹지 않으면 배신감을 느낀다.
“아니, 내가 이렇게 정성껏 준비했는데, 이걸 안먹어? 다른 집에서는 먹었으면서 내가 준비한 것은 안먹어? 저 목사와 나는 이제 모든 관계가 끝이야.”실제로 성도가 준비한 음식을 목사가 먹지 못함으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간 일들이 많이 있다.
===> 왜 그러한가? 배신감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학에서는 목사가 잘먹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 우리에게는 이런 연약함이 있다. 그래서 마귀가 성도를 넘어뜨릴 때 바로 이 배신감을 사용한다. 성도가 목사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하고, 목사는 성도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한다.“어떻게 목사님(저 집사님)이 나에게 이럴수가 있지?”===> 배신감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다. 배신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마음이 아니라,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다.
===> 인간적 친분관계 때문에, 인간적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라. 인간적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이 먼저이다. 인간적 친분관계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받는다.
===> 옆사람과 인사합시다.:<하나님의 뜻이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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