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 32 : 25 – 29
제목: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
시내산 아래에서 벌어진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에는 특이점이 있습니다.
바알이나 아세라 같은 근본적으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황금송아지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이것을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황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을 자신들 마음대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조작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아론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원한 하나님은 자신들의 마음을 만족시켜 줄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모습이 송아지입니까?
농경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애굽에서 익숙했던 신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농경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 속에서 소는 풍요와 안정을 주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송아지의 형상을 통해 지금 자신들에게 필요한 평강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린 신앙’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하여 주지 않으시면 놀라거나 실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필요로 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하나님과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다른 것입니다.
내 뜻과 달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사람을 성숙한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 어려움 속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환난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이스라엘이 보여 주는 문제는 두려움으로 인해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믿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모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보기라도 할 수 있다면 덜 두렵겠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생각하며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의 신앙도 이처럼 상황에 따라 변할 때가 있습니다.
재산이 있을 때는 믿음 좋은 사람처럼 행동하다가, 수중에 재산이 떨어지면 믿음도 함께 쪼그라듭니다.
성도의 수가 많으면 믿음 좋은 사람처럼 행동하다가, 성도의 수가 줄어들면 믿음도 함께 줄어듭니다.
상황이 안정적일 때는 믿음이 좋던 사람이, 삶에 어려움이 닥치면 믿음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모습은 아직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신앙의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믿음, 비록 지금 눈앞에 보이는 뚜렷한 변화가 없어도 하나님을 믿고 행할 수 있는 믿음, 이와 같은 믿음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이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자신들의 뜻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모세는 ‘여호와의 편에 설 자가 누군가?’ 라고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과 모세의 편에 서겠다고 나선 지파가 ‘레위 지파’였습니다. 이때까지 레위지파는 별볼일 없는 그런 지파였습니다.
창세기 49장 5절~ 7절을 보면, 이들의 조상 야곱이 12지파를 불러 축복기도를 할 때에, 시므온과 함께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라는 예언을 받았던 지파입니다.
6절에서,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노여움, 혹독, 저주가 야곱이 이들에게 해준 기도의 내용이고 평가입니다. 그랬던 레위가 모세의 편, 하나님의 편에 선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의 기도의 이유는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에서 참혹한 일을 당했을 때, 그 복수를 위해 세겜의 남자들을 속이고 살육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레위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입니까?
본문 27절에,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레위의 입장에서 보면 참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사랑하는 가족, 사랑하는 동생이 당한 일을 보고 울분에 저질렀던 일로 인해,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후손들에게까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저주에 가까운 기도를 들어야 했었는데, 그런 레위의 후손들에게 사람들을 살육해야 하는 또 한 번의 상황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사랑하는 형제, 친구, 이웃을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이러한 임무에 어떻게 쉽게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함으로 인해, 이번에도 또 한 번 레위 지파의 운명이 바뀝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들의 행동을 ‘헌신’이라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레위지파는 12지파 중 하나의 지파가 아니라, 하나님께 구별된 특별한 지파의 지위를 받게 됩니다.
우리의 눈에는 같은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 사건을 구분하십니다.
나를 위해 내 생각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는 행동으로 구분하여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처럼 나도 분명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에도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합당한 일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레위가 했던, 같은 일 같지만 다른 일이 되었던 이 두 사건처럼 나를 위한 일인가? 하나님을 위한 일인가가 그 일의 의미를 완전히 다르게 만드는 경험을 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 한 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일을 해야 할 때, 이 기준을 갖고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을 위한 일인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혹 내 생각과 판단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자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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