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6 : 16 – 21
제목: 물 위를 걸어오심 (말씀: 최민환 목사님)
본문의 내용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도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사건은 동일하게 기록해도 요한복음은 강조점이 약간 다르다.
마태는 물 위를 걸어오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고 있고,
마가는 풍랑 속에서 걸어오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강조하는 반면에,
요한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고 예수님과 함께 배가 가려는 곳에 도착하게 된 것을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제자들이 풍랑 때문에 고생하는 것에 초점을 두지만, 요한복음은 제자들의 고생이 언급되지 않고,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즉 요한복음은 풍랑으로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구원해주기 위해 찾아오신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가려고 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심으로 가능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설명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말씀이다.
오늘 본문 바로 전 구절인 6장 15절에 보면, “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 라고 기록한다.
오병이어를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했다. 예수님이 자기들의 왕이 된다면 자신들의 먹는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예수님이 피하신 것은 그들의 목적과 예수님의 목적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떡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었다. 이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을 때 "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 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심으로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이셨다. 떡의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떡을 보고 있었다. 떡을 위해서, 자신의 배부름을 위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피하셨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피하신 것은 곧 “ 나는 너희가 원하는 그런 일을 위해서 온 메시야가 아니다 ” 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떡의 원리로 바라보지 말라.
그러면 인생의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기적을 보여주셨을까요? 신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그런 기적을 행하신 것은 성도가 들어가게 될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표적, 즉 싸인, 메시지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적이라는 사건 자체만 본다. 기적을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지 않고 기적이라는 신기한 사건만 생각한다. 그래서 기적에 집중하느라, 예수님도 제대로 못 보고, 하나님 나라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은 분명 오늘날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 기적을 행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적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것도 이스라엘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나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나를 먹으면서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배우라는 것이었다.
오병이어의 목적도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오늘 본문도 제자들의 고생을 해결해주는데 초점이 있지 않고,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함으로 배가 가려던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을 강조한다.
왜 요한복음은 문제해결이 아닌, 목적지를 강조할까? 그것은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세상은 무너지고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 요한일이삼서, 요한계시록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세상의 고난은 잠깐이다. 곧 하나님 나라가 임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그때까지 인내하고 참으라는 것이 사도 요한의 서신서 특징이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 의하면 성도의 삶의 목적은 아주 명확하다.
즉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사람이다.
성도의 삶의 목적이 그러한 것임을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으로 보여주신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오직 가나안 땅에 합당한 사람을 만들어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시는 것이 목적이셨다.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이것저것 다양하게 배불리 먹는 삶이나, 또는 그들이 원하는 편안하게 안주하는 삶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오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훈련과 전쟁과 전진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이스라엘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애굽에서 나올 때도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가능했고, 홍해를 건널 때도 하나님이 바다를 열어주셨기에 가능했다. 그들은 항상 불신앙하고 불순종했기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끝까지 인도하셨기에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노력과 행위와 공로, 즉 율법의 행위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들어가는 곳이다. 그래서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수 없었다.
여호수아, 즉 신약의 헬라어 발음으로는 <예수>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사는 이 세상은 풍랑과 파도가 많은 곳인데, 이 모든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이겨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가려던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메시지가 있는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풍랑을 헤쳐가며 행복과 만족이라는 목적지에 가려는 사람들에게,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행위와 노력에 의지하여 행복과 만족에 이르려는 사람들에게 요한복음은 ' 너희의 힘으로는 절대 약속의 땅, 즉 행복과 만족의 땅에 이르지 못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오직 그 길만이 너희가 가려는 안식의 땅, 행복의 땅, 평화의 땅에 들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오늘 본문 20절에 “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 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환경은 몰아치는 태풍과 같은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 내니 두려워 말라 " 하고 말씀하셨기에, 그리고 그 약속의 땅에 반드시 나를 데리고 들어가신다고 약속하셨기에 성도는 말씀만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인도하실 결국, 하나님이 이루실 결국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풍랑을 잘 이겨 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예수님만이 여러분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다. 믿음으로 그 주님을 의지함으로 삶 속에서 주님의 임재와 인도를 받는 성도와 가정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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