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5:1–16
제목: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심
요즘 여러분의 마음 상태는 어떻습니까?
성도의 마음은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양문’이 있고, 그 근처에 ‘베데스다’라는 못이 나옵니다.
양문은 희생제사의 제물인 희생양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희생으로 장자의 희생을 피할 수 있었던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양의 희생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그런 양문 곁에 ‘은혜의 집’이라는 뜻의 베데스다가 있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공간입니다.
이곳에 각양 병명의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가 어떤 병이 든 낫게 된다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를 믿는 병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 들 중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질문합니다.
너무도 어이없는 질문입니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이런 질문에 그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5:7)
‘네 주님 낫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정확한 대답일 텐데, 그의 대답도 엉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말씀에 오늘의 핵심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는 유일한 길이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는 길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자신을 연못에 넣어달라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예수님 조차도 보조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은혜를 의미하는 베데스다 연못에 은혜와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으로 사람들은 모여 서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축복이 내 불행이 되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절대 자기 힘으로 연못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연못 주변에 모여 있습니다.
복음 앞에 우리가 이와 같습니다.
이러한 병자에게 예수님은 ‘일어나 걸어가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그를 도와 연못에 넣어 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나은 것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베데스다 못 때문에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저 보조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도 잘못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병자는 말씀대로 나았습니다.
이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온전히 바라고 있던 베데스다라는 연못에 대한 믿음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만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베데스다 연못은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런 바른 신앙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