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창38:12-30
제목:하나님의 일하심
▶첫째, 하나님의 일하심은 세상의 윤리도덕과 상식을 초월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윤리와 도덕, 상식을 초월해 계심>을 실감할 수 있는 성경 중의 하나가 창38장이다. 다말이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하여 두 아들을 낳는 일은 세상의 문화나 윤리와 도덕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내용이기도 하다. 오늘 본문에 보면, 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를 속여 그와 동침하여 자식을 임신했다. 이런 행위는 사실 윤리 도덕적으로 보면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의>로 본다. 왜냐하면 며느리 다말이 그렇게 한 것은, 자기 육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엘제도>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말이 고엘제도를 지키고자 했더라도, 시아버지를 속이고 창녀로 위장한 다말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행위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하든 죄인이다. 성경이 <죄인을 의롭다고 하는 것>은,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한다. 유다는 말씀을 어기려고 했고, 다말은 말씀을 지키려고 했다. 그래서 다말은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았고,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영광을 허락하셨다.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줌으로 인해 죽음을 면했다. 그러나 여리고성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기생 라합은 민족을 배반한 용서받을 수 없는 반역행위를 한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평가가 무엇인가?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5) 여리고성 사람들에게는 매국노였지만, 하나님께는 의인으로 평가받은 것이다. 그리고 라합의 직업은 몸을 파는 창녀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럽고 추함에 상관없이 라합을 의롭다고 평가하셨고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이 세상의 윤리도덕과 상식을 초월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세상의 윤리도덕과 상식이 아니라, 하나님중심의 가치관을 가지고 신앙생활하시기 바란다.
▶둘째, 하나님의 일하심은 반드시 희생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왜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가 요셉의 이야기 중간에 끼어들어가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신 이유와 목적을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다말이 창녀가 되어 유다와 동침하는 낯뜨거운 이야기가 성경에서 삭제되지 않고 그대로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나타나 있다. 그것을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이시는 것이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신25:5-6) 고엘제도의 의미는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에서 끊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구원>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고엘제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은 형제의 가정을 언약백성으로 보존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포기하는 <희생>의 의미가 담겨 있다. 26절에 유다가 며느리 다말에 대해서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가문보다는 아들을 생각했던 유다 자신보다, 가문의 보존을 생각하며 스스로 창녀처럼 되어 시아버지와 동침하는 수치를 마다하지 않은 다말의 희생을 옳게 본 것>이다. 유다와 다말 이야기는 애굽으로 팔린 요셉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희생>이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리고 그곳에서 총리가 되어 결국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가문을 살렸다 요셉의 고난과 희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을 예표하는 것이다. 구원의 도리는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완성된다. 이 말은 곧 인간의 어떤 행위나 업적, 선행도 구원에 효력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여름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하고자 한다면, 자기의 유익과 손해를 따지기보다는,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신앙의 원리를 붙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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