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창 4:16-26
제목 : 성을 쌓고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 동산을 떠나고, 다시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여호와 앞을 떠나게 된다. 죄는 결국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가인이 죄의 대가로 유리하는 자로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자마자 놋 땅에 정착하려하는데, 거기서 성을 쌓게 된다. 그런데 가인은 성을 왜 쌓았을까? 무엇보다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면서 모든 사람에게서 죽음을 면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가인은 하나님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성을 쌓은 것이다.
성도는 스스로 성을 쌓은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히 성도의 성이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친히 성이 되어서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그 안에서 평안히 살게 해 주시는 것이다.(시18:2) 내가 나를 위하여 성을 쌓으면 그 성안에 갇히게 되지만, 하나님이 친히 나의 성이 되어주시면, 하나님과 함께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이것이 성도의 참된 자유이다.
그렇다면 가인의 후손들을 어떠했을까? 라멕을 보면 그는 두 아내를 맞이하는데, 라멕은 하나님이 창조때부터 세우신 가정의 근본을 파괴한 사람이다. 두 아내의 뜻을 보면 ‘아나’는 단장하다, 아름답다라는 의미이다. 씰라는 그림자, 딸랑거리는 자, 악기 다루는 자라는 뜻인데, 라멕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여인이었을 것이다.
성도가 삶에 늘 경계해야 할 것은 눈과 귀이다. 많은 죄가 보고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보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을 때 우리는 죄의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허영의 늪에 빠지고, 성적인 늪에 빠집니다. 비교의 늪에 빠지고, 교만의 늪에 빠지게 된다.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의 헛된 것들을 보지 말아야겠다.
굳이 듣지 않아도 되는 세상의 헛된 풍조를 듣지 말아야겠다.
라멕의 자녀들은 참 다재다능하다. 하지만 라멕의 아들에게도 역시 하나님은 없었다. 그 당시의 문명 발달에는 공헌하였지만, 그들의 죄악은 더욱더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이 시대 속에서도 볼 수 있다. 문명은 발달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점점 더 혼탁하여지는 것을 볼 때 성도는 더 지혜롭게 분별하여 이 세상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 죄악과 교만의 끝은 라멕을 통해서 볼 수 있다.(23~24)
이 구절은 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 시는 라멕 얼마나 악하고, 교만하고, 잔인하지는 보여주고 있다. 라멕은 아내를 부른다. 그것도 크게 소리를 내며, 마치 자랑하듯이 부르고 있다. 그런데 그 부른 내용이 무엇인가? 자신의 몸에 입은 작은 상처 때문에 젊은 소년을 죽였다는 것인데, 아무런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라멕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다. 아담과 하와로 시작된 죄는 가인에게로, 그리고 라멕에게 점점 악해져 가고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악된 세상에 하나님은 늘 언제나 새로운 소망을 주셨다. 하나님은 다시 아담과 하와에게 새로운 생명, 셋을 허락하셨고, 그 생명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뜻을 이어가셨다.(25-26)
그렇기에 오늘 하루 가인의 계보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셋의 계보를 따라 살기로 선택하는 우리 심천사랑의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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