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렘19:1-20:6
제목: 깨어진 호리병의 비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항아리를 하나 사게 하신 후에 백성을 대표하는 장로 몇 사람과 제사장 몇 사람을 데리고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시드 문은 이스라엘의 부정한 쓰레기를 처리하고 태우는 부정한 장소였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는 아기를 불살라 제사 지내는 인신제사의 추악한 장소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3절입니다. “말하기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주민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그것을 듣는 모든 자의 귀가 떨리니” 귀가 떨릴 정도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엄청난 재앙을 내리실 때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는데요. 4절에서 5절까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임재를 보여주신 예루살렘을 “남의 나라처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조상이나 유다의 왕들도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특히 그들은 자식을 우상에게 번제물로 바치는 역겨운 죄악을 범했습니다. 그 죄악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했느냐면, 하나님께서는 ‘상상조차도 하여 본 적이 없는 죄’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를 보여주기 위해 예레미야에게 사가지고 간 항아리를 백성들의 대표들이 보는 앞에서 깨뜨리라고 명하셨습니다. 항아리가 깨어지면 다시 원상태로 쓸 수 없는 것처럼, 유다와 예루살렘을 그 항아리 그릇처럼 깨뜨리신다는 의미라고 해석해주셨습니다. 그 징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도벳처럼 만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도벳이란 북치는 곳 이라는 뜻인데요. 힌놈의 골짜기에서 인신제사를 드리느라 그 아이들을 뜨거운 불에 죽여서 제사를 드렸으니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그곳에 가득했겠죠? 그러니 그 소리가 거슬리니 북을 쳐서 그 소리를 안들리게 만드는 곳이 바로 도벳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자기의 기쁨을 위하여 자기의 성공을 위하여 자녀들을 죽이는 곳 자기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희생하는 곳 그래서 힌놈의 골짜기를 게헨나 여기서 헬. 지옥이라고 하는 단어가 파생되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백성들이 사는 곳이 도벳처럼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지금 거룩한 땅 예루살렘 평안의 성이 지옥같아 질거라고 저주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이 도벳처럼 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13절입니다.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 예루살렘의 집과 유다의 왕궁이 집집마다 우상에게 제물과 향을 피워 올리고 이방신들에게 술을 부어 제물로 바치는 모습이라고 질책하시면서, 그들의 모습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예루살렘을 도벳처럼 만드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성도님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실 주님이 빚어 만드신 항아리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에서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헛된 것으로 그 항아리를 채우게 되면, 우리는 결국 깨어진 항아리처럼 되고 만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깨어진 그릇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으로 하나님의 손에서 쓰임 받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20장에서 예레미야는 도벳에서 돌아와서 주님의 성전 뜰에 섭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멸망을 선포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지금까지 평안에 대해서만 선포되어졌습니다. 안전하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평안하다 라는 말씀만 백성들은 들었습니다. 자신들의 죄악이 만연함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은 안전하다였기에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돌이킬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이야기만 듣던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듣게 되는 말씀은 ‘고집을 부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에, 재앙을 내리겠다’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제사장이며 총감독관인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때리고 차꼬를 채워 가두워 버립니다. 예루살렘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예레미야를 때리고 가둔 것입니다. 이들이 유지하고자 했던 질서는 자신들의 뱃속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살아간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온 유다가 하나님이 아닌 천체에 향을 피우고, 이방 신들에 제물을 바치고 있다는 것을 대제사장은 알고
있었을 것이고 총감독관인 바스훌도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가르치고 지도해야 하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괜찮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뱃속만을 채웠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들의 죄악을 눈감아줬습니다. 하나님께는 사랑이 풍성하시는 분이시는 우리는 예배만 드리면 괜찮다고 예배드리고 난 후에 어떻게 살아가든지,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가고, 악을 행하며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가르침에 반하는 말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세워놓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로 여겼습니다. 백성들에게 지금까지 안전하다고 가르쳤던 자신들의 가르침과 다른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기에 그들을 때리고, 가둡니다. 마치 우리 예수님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에게 끌려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에도 불구하고 매 맞고,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이러한 총감독관의 행동을 보면서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성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게 슬픈거죠? 지도자의 책임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스훌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는데요. 하나님께서 바스훌의 이름을 ‘마골밋사빕’으로 바꿔 부르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골밋사빕은 사방으로 두려움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는 안전하다고 외치며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위하여 살았던 바스훌이 더 이상 안전한 곳에 거하며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사방이 두려움에 휩싸이는 사면초가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4절과 6절에 하나님 심판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바스훌의 모든 친구들이 원수의 칼에 찔려 죽는 것을 바스훌이 보게 됩니다. 바스훌의 친구들은 바스훌과 같이 하나님을 이용한 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결정을 좋아 했던 바스훌의 친구들이 죽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거나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지 않은 결과 실제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 나라의 종이 되어 이방의 왕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팔아서 쟁취했던 모든 재산들과 보물들을 잃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가득했던 온갖 재물과 재산과 귀중품과 보물을 바빌로니아의 손에 넘어가게 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자신의 배를 채우고 그동안 평안하게 살았던 모든 삶들이 무너지게 되고 다 잃게 됩니다. 바스훌도 포함한 거짓 예언을 들었던 자들과 함께 그 거짓 예언을 듣고 좋아했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이방 땅에서 죽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도님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때로는 외로울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총감독인 바스훌이 아니라 예레미야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내가 듣고 싶은 말씀을 골라 듣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에게 좋고 이것은 나에게 안 좋아라고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살아가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토기장이의 손에 진흙이 들려 있어 토기장이가 원하는 대로 결국 만들어 지는 것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뜻때로 살아가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되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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