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행24:24-25:12
제목:나쁜 벨릭스 더 나쁜 베스도
오늘 본문을 보시기 앞서 먼저 이 사건이 펼쳐지고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가 어떤 도시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분봉왕은 헤롯대왕이었습니다. 그후 헤롯 아그립바는 로마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갈멜 산 남쪽,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였던 빌립보 지역에 가아사랴. 황제의 이름을 딴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고 황제를 위한 신전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그 도시를 황제에게 헌정해 버립니다. 그 공로로 헤롯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이 유대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니 이 가이사랴 빌립보 도시가 얼마나 화려했겠습니까? 대층 그지같이 만들어 놓고 황제에게 바친다고 했으면 황제가 좋아했겠습니까? 저 놈을 당장 죽여라 했겠죠? 그러니 그 도시가 얼마나 화려하고 얼마나 웅장하고 세속적이고 얼마나 음란하고 얼마나 영적으로 타락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화려하고 음란한 도시에서 제자들을 불러다 놓으시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했던 장소가 바로 이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세례요한 엘리야 라고 하나이다. 미쳤다는 소리죠? 그 와중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하는 고백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황제를 위한 그 도시 거기에 지금 로마 총독부가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그 로마 총독부가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 감옥에서 어제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24절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수 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그 반응이 25절인데요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형편없는 정치가 였던 벨릭스도 사도 바울의 복음을 듣고 두려워 했습니다. 두려워 했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길 노력했어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26절을 보시면 개인적으로 돈을 받을까 하는 욕심으로 사도 바울을 여전히 잡아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구원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두렵고 떨림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요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여전히 그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복음을 이용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받은 그 구원이 그러므로 정말로 갚진 것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7절을 보니 그렇게 2년을 그렇게 감옥에서 가택에 연금을 당한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벨릭스 바울이 무죄임을 알았음에도 유대인들을 두려워 그들의 비유를 맞추고자 바울을 잡아 두는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새로운 유다의 행정관으로 부임을 해 옵니다. 요세푸스의 유대사에 보면 악랄하고 부도덕 했던 벨릭스와는 달리 베스도는 탁월한 행정가로써 AD 60-62년간 유대 지역을 다스렸던 명 행정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장면이 몇 일 동안 펼쳐 지는데요. 하나님의 성. 거룩한 성인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인 바울을 죽일려고 부단히고 노력하고 있고 황제의 도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인 바울을 살릴려고 노력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본문을 칼빈은 기회는 한번 밖에 없다. 그러니 그 기회를 마귀의 종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라고 주해를 달았습니다. 그러니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분별하는 것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의무인줄로 압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니 베스도가 부임하고 삼일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 대제사장과 유대인들 중 높은 사람들은 베스도에게 부임인사를 하고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줄 것을 요청합니다. 지금 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에 대한 분노가 여전히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철통같은 경비와 로마총독부가 있는 가이사랴에서 바울을 죽이는 것보다는 그래도 자기들이 장악하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암살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부담이 덜 될 것 같은 생각에서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죽이고자 예루살렘에서 재판하기를 요청합니다. 이 요청에 대해 베스도는 너희가 가아사랴로 와서 바울을 고발 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래서 가이사랴에 사도 바울에 대한 재판이 또 다시 이루어 집니다. 7절에 보니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예루살렘에서 왔던 사람들이 바울을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했다고 합니다. 원래부터 거짓이었고 거증 증인들로 구성된 기소였기에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바울도 8절에서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아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재판은 무죄가 되고 바울은 석방될 것입니다. 그렇게 재판을 무죄로 판결하고 석방하면 될텐데. 그런데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하겠느냐?고 묻습니다. 많은 역사가들은 베스도를 명행정가로 평가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도 역시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진리보다는 앞으로 새로 부임한 유대지역을 통치하려면 유대인들과의 관계가 좋아야 했기에 그도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정치적인 퍼포먼스 합니다. 그래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서 재판하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에서 가이사의 재판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그저 아닙니다. 나는 무죄하니 여기서 재판을 마쳐 주시오 했으면 재판은 끝이 나고 바울은 무죄로 석방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날때부터 로마시민권이 있었던 전세계 인구의 0.89%에 지나지 않았던 로마시민권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도행전 23장 11절 말씀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12절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베스도가 가이사의 재판을 요청한 바울의 청대로 가이사의 재판을 허락하는 것으로 오늘 본문이 마쳐집니다. 성도님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사명이었습니다. 성도님들 사명이란 장애물이 생기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넘어가는 것입니다. 위기가 닥치면 더욱더 힘을 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명이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사도바울만 사명자입니까? 이방인의 사도라는 거창한 사명만 사명이겠습니까? 교회학교의 교사가 되어 맡겨주신 아이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도 사명이요 한 구역의 구역장이 되어 맡겨주신 구역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사명입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어머니가 되어 자녀들을 양육하고 기도하는 것도 사명입니다. 성경말씀은 아니지만 리빙스턴은 사명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반대로 이야기 하면 사명이 없으면 죽는다입니다.
성도님들도 맡겨 주신 사명 잘 감당하고 계신가요? 얼마 안남은 올 한해 하나님께 칭찬받는 올 한해 그리고 우리들의 인생되시는 이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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