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행19:32-41
제목: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
▶첫째, 복음은 우리의 생계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전해야 한다.
어제 본문에서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자기 직공들과 자기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을 반대하는 소동을 일으켰던 이유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으로 인해서 자기들의 수입에 막대한 지장이 생겼기 때문(25-27절)이었다. 그런데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선동할 때 뭐라고 말하는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 때문에 자신들이 직업이 천하게 여겨질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르테미스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여신의 위엄이 땅에 떨어지게 될 것”(27절)이라는 것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운다. 즉 바울을 반대하는 이유를 자신들의 신앙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무엇인가? 그가 아르테미스 여신을 위하는 척, 아르테미스 신전을 위하는 척을 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수입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는 아르테미스 신을 위해 바울의 복음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계와 이익, 즉 먹고 사는 생계를 위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반대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데메드리오는 <신앙보다 생계가 더 중요했던 사람>이다. 사실 세상 모든 사람이 데메드리오와 다를 바가 없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생계, 즉 먹고 사는 문제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다보니, 교회 안에도 데메드리오 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즉 복음보다 생계가 더 중요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있다. 그래서 데메드리오 같은 사람들로 인해서 복음은 <소원성취형 복음, 문제해결형 복음>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생업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건강을 위해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학업을 위해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안에서 <복음은 온통 생업에 유익을 주는 것>으로 선전되고 있다. 그러나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심판과 멸망의 자리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으면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영생구원을 받으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복음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해도 되고, 순종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반드시 믿고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왜인가? 복음은 생명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소망하게 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하고, 하나님을 제일로 여기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복음은 생계보다 중요하다.
▶둘째, 복음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때문에 전해야 한다.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32절) 데메드리오의 선동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모인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신들이 왜 모였는지 모른 채 모였던 것이다. 마치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왜 모이는지 모르고 남들이 가니까 따라 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모임의 해산도 너무 쉽게 이루어졌다.(40-41절) 왜 이렇게 되었는가? 군중심리에 의해 움직였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성숙한 시민인데, 일단 군중 속에만 들어가면 감정적인 몇 마디에 휩쓸리게 되는 상태가 된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휩쓸리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과 감정은 분위기에 의해 쉽게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음악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분위기만 조성되어도 감정이 움직이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분위기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조심해야할 부분이다. 왜냐하면, 내 마음이 동했다고, 내 마음에 좋았다고 그것이 곧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은 감정 따라 움직이면 안 되고, 군중심리 따라 움직이면 안 된다. 왜인가? <신앙은 깨달음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게 되면서 신앙이 시작된다. 이것은 말씀과 성령에 의해 주도되어야 하는 것이지, 어떤 분위기에 의해 되어지면 안 된다. 신앙은 분위기나 환경에 영향 받으면 안 된다. 신앙은 말씀에 영향 받는 것이다. 분위기에 휩쓸리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 본문에 연극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바울이 말한 복음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데메드리오가 바울에 대해 분노하니 함께 분노했고 욕하니까 함께 욕한 것뿐이다. 즉 바울에 대한 데메드리오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이런 모습은 교회에서도 많이 볼수 있다. 여러분, 성도는 감정이나 분위기를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 따라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왜인가? 감정이나 분위기를 따라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도는 말씀이 뭐라고 하시는지, 내 생각과 행동이 말씀앞에서 올바른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말씀에 의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남의 감정과 분위기에 휩쓸리게 된다. 왜 우리가 진리의 말씀인 복음을 믿어야 하는가? 복음은 소망이 없었던 우리 인생을 바른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복음을 믿어야 하고, 왜 사람들이 싫어해도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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