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행19:21-31
제목:복음에는 반대가 있다
▶첫째, 복음은 주의 일에 우선을 두는 사람에 의해 전파된다
바울은 아무리 대적자가 많고, 박해가 있어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모든 상황 속에서 항상 하나님의 일이 우선이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에 우선을 두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둘째, 복음은 언제나 해피엔딩의 역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본문을 보면 은장색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사도 바울을 반대하고 핍박하는 일이 생겼다. 은장색이란, 은을 세공하는 사람인데,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돈을 벌게 해준 사람이었다.(24절) 아데미란,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의미하는데, 수많은 유방을 소유한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아기를 잘 낳게 해주고, 다복을 준다는 풍요의 여신이다. 데메드리오는 아데미여신의 신상모형을 만들어서 그곳을 여행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팔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복음으로 인해서 자기들의 수입, 즉 돈벌이에 막대한 지장이 생기자,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의 복음사역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에는 언제나 해피엔딩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고전16:8-9) 데메드리오의 선동사건을 비롯하여 에베소에는 바울을 대적하는 자가 많았다. 사실 에베소에서의 사역은 그 어떤 다른 곳에서의 사역보다 훨씬 더 큰 성과를 거두었던 사역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은 오만이나 되는 마술책들을 모두 불태울 정도의 놀라운 복음의 열매가 있었지만, 그러나 모든 것이 항상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왜 그런 것인가? 왜 복음사역에 방해가 있고, 반대가 있는가?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①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방해하는 사탄마귀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고, ②이 세상에는 천국에 이르지 못할 이방인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마13장의 알곡과 가라지 비유 참조) 그러므로 교회 밖에도, 교회 안에도 마귀에 속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 어려움이 있고, 교회에 박해가 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안에도 가룟유다가 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우리 역시 주의 일을 하면서 늘 만사형통한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여러 가지 형태의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런 일들로 낙심하거나 믿음의 걸음을 멈추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에는 언제나 해피엔딩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환경에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우리의 인생 결론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맡기신 사명 감당하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한다.
▶셋째, 복음은 이름 없는 성도들의 헌신을 통해 열매 맺는다.
바울이 바울되기까지는 바울의 주변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를 도와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 본문에도 바울을 도왔던 사람들이 나온다.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메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22절)이 있었고,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선동해서 소동을 일으켰을 때, 그 때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봉변을 당했던 가이오와 아리스다고(29절)가 있다. 그리고 바울이 백성들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할 때, 그를 말렸던 제자들(30절)이 있었고, 또 바울로 하여금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했던 아시아 관리들(31절)이 있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은 여러 방향에서 바울을 돕기는 하였지만, 실제 그들의 이름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숨은 일꾼들이었다. 이들은 바울의 복음사역에 동참하면서, 많은 고난을 받고 핍박을 당하고, 자신의 재물을 헌신하면서까지 바울을 도왔다. 그러므로 생각해 보면, 에베소에 있었던 광대하고 유효한 복음의 열매는 바울 한 사람만의 수고의 열매가 아니라, 이름 없이 바울을 도운 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분, 복음의 역사는 이름 없이 희생하는 성도들의 헌신이 더해져 맺어지는 열매이다. 복음사역은 누군가의 희생과 수고 없이는 불가능한 사역이다. 그런데 바울을 도왔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복음사역에 헌신했던 것일까? 그것은 <자기를 비우는 마음>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수 있었던 것 역시 자기를 비우셨기 때문(빌2:5-8)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기를 비우는 것”은 기독교신앙의 정수이다. 바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군가 바울의 옆에서 자기를 비우고 대신 죽어지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정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갈등과 다툼은 <자기를 비우지 못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여러분, 목사 한 사람만으로는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할 수 없다.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에는 자기를 비우고 이름 없이 헌신하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 생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는 부흥할 수 없다. 오히려 자기를 비우고 죽어질 때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자기를 비우고 섬김의 자리에 서는 성도가 되라. 가정에서, 교회에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참고 자기를 비우심으로, 복음의 열매를 맺는 일에 쓰임받는 성도 되시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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