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행17:16-34
제목:알지 못하는 신에게
사도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마케도니아로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케도니아에서의 사역은 빌립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 베레아를 거쳐 아덴으로 피난을 옵니다. 어제 목사님이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유대인들이 여전히 폭력성을 가지고 불법과 폭력으로 바울 일행을 대적합니다. 그래서 실라와 디모데에게 남아있는 교회와 성도들의 정리를 부탁하고 피난한 곳이 바로 아덴이였습니다. 아덴은 지금의 아테네입니다.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의 수도였고, 문학과 철학의 중심지였고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바로 이 그리스 아크로폴리스입니다. 또한 그리스 하면 신화가 유명하죠? 많고 많은 신들 맨날 바람 피고 싸우고 죽이고 여러 대상과 사랑을 하는 정말 정상적이지 않고 상식적이지 않은 도저히 신 같은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그들의 도덕과 윤리 수준은 높지 않았고, 수많은 신전과 신상들이 존재하는 우상숭배의 도시이자 음란의 도시였습니다. “아덴의 거리에서 사람을 찾는 것보다 신상을 찾는것이 더 쉽다.” 그 당시 아덴의 영적인 상황을 표현한 글입니다. 이런 아테네의 우상숭배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도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참담한 아테네의 모습을 보고 바울은 안타까워하며 분노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유대인들을 피해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을 기다렸다가 다른 도시로 갈 계획이 있었기에 최대한 조용히 숨어 있어야 했겠죠? 그러나 그 분노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열정으로 이어졌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울은 매일같이 논쟁하고 토론합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 사람들을 가리지 않았고, 회당과 광장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토론을 통해 그들의 영적 무지와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그래서 그들이 우상숭배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매일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지적 호기심이 많았던 아테네의 시민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아레오바고가 어떤 곳인지는 큐티를 만드시는 이상우A 집사님이 잘 설명해 놓으셨거든요. 큐티에 있는 각주를 참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21절을 보시면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마치 종로 탑골 공원에 가면 수많은 장기 고수들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마치 옛날 무술 좀 한다는 사람들이 중국 소림사에 모여 늘 겨루고 싸움을 했던 것처럼 그 당시 글 좀 안다는 사람들은 지식이 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덴의 아레오바고에 모여서 자기들의 유식을 뽐내고 논쟁을 하는 일을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 먹으면서 전문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이 등장을 하는거죠? 그러니 그 당시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현장에 바울이라고 하는 듣보잡? 듣도 보지 못한 잡놈이라는 뜻입니다. 이 듣보잡 바울이 나와 매일 논쟁을 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궁금했을 것이고.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전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레오바고에서의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23절입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사도 바울이 보니 너희는 정말 많고 많은 신을 섬기고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혹시 목록에 빠진 신들이 있을까봐. 이름을 알지 못하는 신까지도 섬기는 신전이 있을 만큼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 많고 많은 신들 중에서 오직 만 왕의 왕이신 한 분이신 하나님만을 소개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주인이시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신 분이시고,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손으로 지은 어떤 신전에 거하지 않는 분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더구나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은 부족함이 있어서 사람들의 손에서 섬김을 받으실 분도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신전을 만들고 제물로 신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신전 이 신들을 위해 제물이 모두 쓸데가 없다는 것이라는 겁니다. 진짜 신이라면 이런거 좋아하겠냐는 거죠? 신인데? 이걸로 만족하겠어? 이런 뜻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선언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계획과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선언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인간이 더듬어 찾으면 만날 수 있는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찾아 알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주전 6세기 시인인 에피메니데스의 표현인데요. 그만큼 바울은 그리스 로마 사상에 박식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 에피메니데스가 “모든 민족이 신을 찾고 신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해야 한다”고 그 시를 인용하여, 모든 민족이 살 길은 그 유일하고 참 신이신 하나님을 찾는 일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설교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29절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그리고 30절입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통찰력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신을,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새겨서 만든 것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지했던 시대에는 눈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모든 민족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모두 그분의 자녀들이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처럼 새겨지고 만들어진 어떤 존재와 같다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구원자, 심판의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믿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만물의 근원이시고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바른 자세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바울의 설교를 들은 아테네 사람들의 반응은 언제나 그랬듯이 둘로 나뉩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비웃은 사람도 있고, 화를 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러는 부활의 복음에 관해 더 듣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울 편에 가담하여 결국은 신자가 되었습니다. 성도님들 하나님은 창조의 주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민족을 만드시고 그들의 경계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을 찾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심으로 그분의 살아계심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기뻐하며 그분을 찾고 만나고 교제하며 동행하는 신앙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지금도 이 설교는 유효합니다.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는 이 시대 가운데 그 물질조차 창조하신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진짜 신이라면 우리들이 추구하고 있는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우리에게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옵기는 말씀으로 깨닫는 귀와 눈이 있길 소원합니다.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함으로 바르게 섬김으로 바르게 사랑함으로 칭찬받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그리고 우리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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