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대상 11:1-19
제목: 다윗이 왕이 되다
오늘이 11장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보름 이상 봤던 “아담, 셋, 에노스의 족보”는 사실 오늘 본문을 이야기 하기 위한 서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만큼 오늘 본문은 중요한데요. 어제 본문에서 사울 왕의 긴 족보가 나왔습니다. 그 결론으로 사울은 실패로 끝이나고 다윗이 새롭게 등장을 합니다. 성도님들 사울이 어떤 왕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해서 세운 왕이었습니다. ‘그 때에 왕이 없었더니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했던’ 그 시대 사사기 시대를 지나서 사람들이 달라고 달라고 해서 인간의 기준 인간의 눈높이에 맞춘 왕이 바로 사울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어깨가 하나 더 있을 정도로 큰 키/ 싸움에 능한 용맹한 왕 사울. 사람들이 보기에 이 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어 보이는 그 완벽해 보였던 인간이 세운 눈에 좋아 보이는 왕이 실패하고 이제는 사람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막내 말째. 다윗이 왕이 됩니다. 그런데 그 왕은 누가 세웠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다윗 왕은 하나님이 뽑은 하나님 마음에 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성도님들 다윗이 왕이 됐다는 것은 아 사울 다음 사람으로 다윗이 왕이 됐구나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인간이 통치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됐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등장을 역대기 기자는 그리고 유대인들은 다윗의 등장을 다윗 이야기를 이리도 좋아하고 있는 것입니다. 포로에도 돌아온 이스라엘 아니 유대백성들에게 회복되어야 할 국가 회복되어야 할 예배 회복되어야 할 사회 공동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세운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이어야만 한다는 이걸 말해 주는 것이 바로 “다윗왕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이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헤브론에 모여 다윗을 보고 이르되 우리는 왕의 가까운 혈족이니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약간 이상합니다. 빠져도 너무나 많이 생략이 되었습니다. 어제 본문 10장 14절이 “그를 죽이고 그의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더라“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역대상만 있는게 아니잖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 사실이 어떻습니까? 사울의 세 아들 요나단과 두 형제가 죽고 막내 이스보셋이 남습니다. 사무엘하 2:8절에 보시면 사울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베냐민과 이스라엘의 왕을 삼습니다. 이런 표현이 좀 어색하지만 일종의 바지 왕을 삼죠. 결국 이스보셋도 2년 만에 죽음을 당하고 북이스라엘은 왕 없는 세월을 5년 반이나 보냅니다. 그러니까 지금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 왕이 아닌 유다 지파를 위한 왕을 하고 있는데요. 그 기간이 칠년 반이나 됩니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은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는 듯이 다윗이 헤브론에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처럼 선포합니다. 그 7년 반의 고통스러운 기간을 모두 다 생략해 버리고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이 역대기의 관점입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와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벌써 4년이나 됐는데요. 통큰통독 세미나를 우리 교회에서 했었죠? 기억은 나시는지요? 그때 주해홍목사님이 설명해 주신 역사서의 관점이 있습니다.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의 관점은 선지자적 관점입니다. 선지자가 맨날 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정신 안차려? 그러다가 포로로 끌려가고 싶어? 어어어 거봐 그러니까 포로로 끌려가는 거야? 라고 자꾸만 책망하고 죄를 지적하고 나무랍니다. 이게 선지자의 역할이니까요. 선지자는 절대 좋은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건 바른 선지자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온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어떻게 말합니까? 평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평안이 아니라 저주요 책망이었던 거죠? 이게 선지자의 관점입니다. 그런데 역대기 저자의 관점은 제사장적입니다. 제사장은 무슨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까?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보하는 쉬운말로 화해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물로 인해 피 흘림으로 죄가 사함을 받도록 하나님과 연결을 하는 직업이 바로 제사장입니다. 그러니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돼. 아직 끝난거 아냐. 괜찮아 하나님이 괜찮다고 했어. 우리 힘을 내보자. 다시 다윗왕의 시대로 다시 우리 그 때로 돌아가보자. 이게 바로 제사장적 관점입니다. 성도님들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이신 최민환 목사님이 어떤 목사님 되셨으면 좋으시겠습니까?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공기반 소리반 양념반 후라이드반? 이런 목사님 되시길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때로는 질책하시고 때로는 용서하신 것처럼 하나님도 아버지의 공의와 어머니의 사랑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것처럼 교회는 공의와 사랑이 적절하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름 바꿔야 하나요? 심천 공의반 사랑반 교회. 암튼 담임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소원합니다.
지금 역대기 기자는 제사장의 관점에서 황폐한 이스라엘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예루살렘에 돌아온 유대 백성에게 그 때로 돌아가자. 하나님께 돌아가자. 다윗왕 때를 추억하며 그 많고 많은 제사와 예배가 있었던 찬양이 풍성했던 그 때를 기억하고 그 때로 돌아가자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있는 왕에게로 나아가니 헤브론에서 다윗이 그들과 여호와 앞에 언약을 맺으며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 아멘
다윗은 무려 세 번이나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이면 충분하지만 이제는 사람들 앞에서도 인정을 받는 왕이 됩니다. 처음 기름을 받고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 그 고통의 순간이 무려 15년간 사울을 피해 도피를 하고 7년 반 동안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으로 고난을 받고 다윗은 40이 되어서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을 받습니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 훈련과 고통의 시간이 다윗을 다윗되게 만든 것임을 잊지 마시길 소원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제일 먼저 한 일은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그 땅이 어떤 땅입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그 산 모리아산 시온산이라고 불리는 땅입니다. 그 지역은 정말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서 제일 힘이 있는 족속들이 살고 있던 땅입니다. 광야 사막과 같은 지역에 우물이 두 개나 있고 적당한 높이가 있어서 난공불락의 요새로 처음부터 유다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었으나 유대 지파 그 누구도 차지하지 못했던 그 땅을 다윗은 왕이 되고 나서 제일 먼저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다윗성과 솔로몬 성전이 그리고 이스라엘의 중심지가 됩니다. 나라를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0절부터 다윗의 전설적인 용사의 이름을 설명하는 것으로 다윗이 얼마나 강성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성도님들 이 다윗의 일생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구절이 바로 9절인데요. 제가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아멘 이게 다윗의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비참한 인생을 삽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하나님과 함께 한 다윗은 점점 강성하여 갔다고 합니다. 이게 역대기 기자가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백전백승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바로 이것이 다윗을 다윗되게 한 그 레파토리의 중심입니다. 성도님들 우리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 되길 소원합니다. 아무리 지금 화려하게 살아도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서 있어도 심지어 왕이 됐어도 하나님이 없으면 그 인생은 망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환란과 고난이 있어도 심지어 그곳이 동굴이어도 그곳이 광야여도 하나님과 함께 하면 된다는 그 믿음과 고백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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