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역대상 6:1-48
제목: 예배가 우선입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보내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다시 성전과 온전한 신앙의 회복을 위해 레위의 자손 제사장의 족보를 그리움과 애정을 담아 기록합니다. 어제 본문인 5장에서는 요단 동편의 지파를 그리고 내일 모레 7장에서는 요단 서편의 지파의 족보를 기록한 역대기 기자는 그 중심인 6장을 레위지파에게 무려 81절이나 할애해서 적어갑니다. 특이한 것은 야곱은 레위에게 축복이 아닌 저주를 전했다는 것입니다. 기억이 나실찌 모르겠는데요. 우리가 흔히 야곱의 축복이라고 부르는 창세기 49장 7절에서 야곱은 레위에게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야곱의 예언대로 레위지파는 모여 살지 않고 모든 성에 흩어져서 살게 됩니다. 이렇게 저주의 메세지를 받은 레위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지파가 되었을까요? 출애굽기 32장에서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우상으로 섬길때 이스라엘을 심판하게 될 때 레위자손들이 모세의 편에 섭니다. 즉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입니다. 또 민수기 25장에서 이스라엘이 싯딤에서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는 것을 본 모세가 이들을 죽이려고 할 때 제일 먼저 이 명령을 시행한 사람들이 바로 레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방법은 하나님 편에 계속 서는 것입니다. 죄악들과 싸울 때 레위지파는 누구보다 앞장 서서 죄와 싸웠던 사람들입니다. 그가 원래 저주를 받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서 복 받는 삶을 살겠다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손에 붙들려 제사장 반열에 오른 이유가 저주를 저주로 그냥 놔둔 것이 아니라 복으로 바꾼 것입니다. 성도님들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는 자리, 말씀의 자리, 하나님과 더 가까이 가는 편에 설 때에 하나님 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역대상 6장은 레위 지파 족보가 81절에 걸쳐 등장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레위인은 두 종류로 구분됩니다.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 레위인과 그 외의 모든 레위인은 일반 레위인입니다. 이 둘은 임무는 완전 다릅니다. 제사장 레위인의 임무는 제사를 집례하는 일이고, 일반 레위인의 임무는 주로 성막 집기류를 관리하고 운반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신 임무였습니다. 그런데 31절 말씀입니다. “언약궤가 평안을 얻었을 때에 다윗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찬송하는 직분을 맡긴 자들은 아래와 같았더라” 그런데 '언약궤가 평안을 얻었을 때' 레위인들의 역할이 애매해졌습니다. 성막이 자리를 잡아 버리자 더 이상 언약궤를 운반할 일이 없어진 일반 레위인들은 할 일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떻게 했을까요?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신 거룩한 임무를 없앨 수는 없으니 언약궤를 옮겨다닐 자리를 몇 군데 지정하고 레위인들이 계속 그 직임을 수행하게 했을까요? 다윗은 과감하게 레위인의 임무 조정에 들어갑니다. 찬양이라는 전혀 새로운 직분을 레위인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하는 일을 레위인들이 성전에서 행하게 된 것입니다. 법궤를 운반하는 일은 무려 21대에 걸쳐 조상대대로 수행해 왔던 거룩한 임무였습니다. 그 일을 그만 두고 다른 모양으로 섬기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새롭게 부여된 임무에 충실한 레위인들 덕분에 아름다운 찬양이 하나님의 처소로부터 늘 흘러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이 같이 주옥같은 시편의 구절들을 묵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 48절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들의 형제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 장막의 모든 일을 맡았더라“ 아멘 딱 한 절 이지만 그들이 어떻게 봉사했는가를 어떻게 섬겼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역대기서를 보면 성전에서 섬기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을 합니다. 심지어는 문지기 까지 나옵니다. 성경은 쓸데없는 것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것을 기록한 공간이 없습니다. 성경에 있는 것은 있어야 할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봉사자는 제사장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저 밖에 있는 문지기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중히 보시는 분이라는 것을 표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 모두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 했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때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은 손길로 예배와 공동체를 섬기는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 인간들은 모릅니다. 알아줘야 하고 칭찬해 줘야 하고 수고했다고 말해야 알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섬김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동체를 섬길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어떤 섬김을 감당 하던지 어느 자리에 세워 지던지 그것이 비록 아주 미비해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 중요한 자리 즉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성도님들 한 나라를 다시 세울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먼저는 나라를 이끌어갈 왕이 필요하고 그 나라를 이끌어갈 돈이 필요하고 그 나라를 지킬 군사력이 필요하겠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사람이 이끄는 나라가 아닌 하나님이 이끄시는 나라였기에 돈을 자랑하고 군사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닌 레위인의 족보를 가지고 그 때를 회상합니다. 이스라엘은 예배를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힘인거죠? 이스라엘이 돌아가야 할 자리가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과의 예배가 바로 된 믿음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 때로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는 그 예배가 실은 얼마나 복된 경험인지 포로기를 지나온 이스라엘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습니다. 왜 인간들은 망해봐야 알까요? 왜 고생해야 깨닫게 되는 걸까요? 성도님들 예배가 복입니다. 예배의 회복이 복입니다. 예배가 은혜요 긍휼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용서받고 예배로 꿈을 꾸고 꿈을 이루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예배자인 우리로 살아가는 우리들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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