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가복음 9:42-50
제목: 소금으로 화목하라
오늘 본문 42절이 ‘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어제 본문의 연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 예수님의 수제자는 베드로이고 그 중에서 3인방을 꼽으라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저번에는 베드로가 사탄이라고 예수님께 혼났죠? 그리고 어제는 요한이 사고를 칩니다. 38절에서 자기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금했다고 하고 다른 복음서에서는 불을 내려 혼내 줄까요? 하고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별명이 우레의 아들입니다. 성질이 불같다는 거겠죠? 어제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우레의 아들이 사랑의 노사도로 변화되는거 와 이건 진짜 대박인 겁니다. 그러니 좀 있으면 야고보와 그의 형제 안드레가 또 한번 사고를 치러 등장할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일텐데요 꼭 중심되는 열심있는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마가는 이를 통해 스스로 서 있는 자는 조심하라는 경고를 하는 것 같습니다. 어쩜 이 힘든 새벽을 깨워 기도하러온 우리들이 이와 같은 우를 범할 확률이 가장 높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주일만 오는 사람들이 교회를 힘들게 하고 주님을 힘들게 할 가능성은 적어 보입니다. 적어도 새벽기도회 정도는 나와야.. 암튼 어제 본문 요한이 사고친 장면을 좀 보면 38절입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어떤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까? ‘우리’입니다. ‘주의 이름’이나 ‘귀신을 쫓아낸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무조건 기준은 ‘우리’입니다. 어제 본문에서 저희들끼리 누가 더 크냐고 도토리 키재기 하던 제자들이 이번에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과 다른 것은 무조건 틀린 것으로 정해 버립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제자들은 주님이 두 번이나 가르켜 준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아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주님 다른 건 다 해도 십자가 져서는 안됩니다. 라고 주님을 책망하고 십자가 죽음을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서 제자 중 누가 제일 크냐고 싸움을 하고 요한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을 금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은 자신들에게만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한이 침해받았다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인 것입니다. 자신들만 할 수 있는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이 자기들만 할 수 있는 은사가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 그들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얼마 전에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여 사람들 앞에서 쪽 팔린 쓰라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더욱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실수했다고 게나 고동이나 다 흉내내다니...요런 고얀 녀석들”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예수님은 다시 한번 제자들의 뒤통수를 치는 대답을 하십니다. 39절 금하지 말라 40절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예수님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직 주의 마음으로, 주의 능력을 구하는 자들이면 누구든지 그에게 역사하십니다. 출신이나 학벌이나 얼굴색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열두 제자들과 같은 사람만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불신앙을 부끄럽게 만드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았습니까? 수로보니게 여인, 소경 바디매오, 회당장 야이로, 치유받은 거라사인의 광인, 그리고 여기 주의 권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이름 모를 사람까지.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님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요 부분이 중요한데요.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봉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없어도 하나님은 주님의 일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회를 잡으셔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기회이고 형통의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사실을 좀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위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에 이어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42절을 보시면 실족케 하는 것보다 소나 말이 끄는 연자 맷돌을 목에 메고 바다에 뛰어드는 게 낫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소홀이 여기시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소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란 것입니다. 그저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니라는 게 정말 정말 중요한데요. 물론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당연하지만 실족시키면 안 되는 소자는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논란은 존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누구인가? 이렇게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마가복음에서 하시는 말씀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봤을 때 분명한 건 삶의 평안과 성공을 위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분명히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는 그들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마가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참 그리스도인지, 십자가에서 내려와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참 그리스도인지 사람들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길목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실족시키면 안 되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가 참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낮아지는 그리스도,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설득하고 미혹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문제, 육신의 삶의 문제를 도와주시는 분이라고 꼬드기는 게 바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실족시키는 일입니다. 요즘 한국에 가면 언제나 듣는 그 말들이 바로 예수님 믿으면 복 받는다 라는 말이 십자가의 믿음을 실족케 하는 말인 셈입니다. 또 예수님은 발이나 손이 범죄하면 손과 발이라면 찍어버리고 눈이 범죄하면 빼 버리라는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또 라고 했으니 같은 맥락이란 의미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실 때 이미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로 산상수훈 때였는데, 마태복음 5장 29절과 30절에서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일부가 죄를 범한다고 그것을 버리라고 하는 건 모순입니다. 눈이나 손이나 발은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독자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으므로 죄를 범하는 주체는 결국 자신 일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육신의 일부를 버려 나머지 육신을 구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육신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 구원받으려는 잘못된 가치관을 버려 영혼을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노력으로 성경을 지켜내려는 마음과 이 신앙이 옳은 것이라 여기는 가치관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 더해 소금은 좋은 것이나 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소금으로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역시 산상수훈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이기도 한데요 생각해볼 것은 맛을 잃지 않은 소금으로 화목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선 누가 큰지를 다투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물론 신앙마저 누가 더 높은지를 가늠하는 오늘날 신앙인들에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고도 되게 어려워 졌는데요.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예수님을 반대하는 신앙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게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큰지를 다투는 제자들, 예수님을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로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구원하는, 우리가 거듭나야 하는 진정한 그리스도는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금의 맛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지시는 십자가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낮아지는 존재인데 낮아지고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에게 주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 이것을 버리고 높아지는 걸 추구한다면 그리스도의 본질이 사라집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처럼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는 맛을 잃은 소금이며, 그런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신앙마저 누가 더 큰지 다투는 건 예수님을 반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화목하라’는 말씀으로 가버나움에서의 말씀을 마치십니다. 앞서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나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살리라’고 하셨던 말씀을 이번에는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치듯함을 받으리라” 라는 말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50절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왜 소금 일까요? 소금은 제사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습니다. 에스겔 49장에서도, 종말에 회복된 성전에서 드릴 제사를 묘사하면서 하나님은 “제사장에게 속죄 제물에 소금을 쳐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속죄제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의 뒤를 따르는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이 받으실 제물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소금은 1차적으로는 ‘예수님과 복음’ 혹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곧 8장 35-28절의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는 제자도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결코 잃지 말아야 하고, 왜곡시키지 말아야 하는 소금은 바로, 예수께서 수난의 죽음 후에 영광을 받으실 메시아라는 것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때에, 사랑과 섬김과 관용과 연합의 삶을 살수 있다는 가르침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무 어려워져서 죄송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편에서 우리가 아니면 안되는 일이 어딨겠습니까? 그런 것이 있으면 하나님이시겠습니까? 우리가 아쉽겠죠?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회 주실 때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는 심천사랑의교회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이것이 형통이고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 있는 지체들과 화목하십시오? 이것이 쉬운 일입니까? 나와 다른 사람들 나와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함께 한다고 쳐도 그들을 대접하고 사랑해 주는 것이 보통일입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자아가 죽고 십자가 져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피 값주고 사신 우리들에게 대한 명령이자 우리 교회가 지켜야 할 소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고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성도들과 화목하시길 특히 우리 주님과 화목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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