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삼하16:15-23
제목:성도의 참된 지혜
첫째, 일의 성공과 실패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판단하지 말라.
오늘 본문에 보면, 압살롬의 반역이 성공한 것처럼 보여진다. 다윗은 도망쳤고, 압살롬은 예루살렘성을 접수했고, 다윗의 친구 후새까지 다윗을 배반하고 자기를 섬기겠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지금 압살롬의 반역은 어떤 막힘도 없이 아주 순조롭게 진행이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이 있는 여러분이 압살롬의 입장이라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하나님이 자기를 돕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 당장 나의 일이 잘 되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돕고 계시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도우시는 경우는 오직 하나 <그 영혼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일의 잘됨과 성공을 위해서 도우시지 않고 <오직 우리 영혼의 잘됨과 강건함을 위해서>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잘됨을 위해서 때로 자기 백성에게 고난과 실패의 길을 가게 하시거나 또는, 가난과 질병의 길을 가게 하실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그러므로 세상 일의 성공과 실패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판단하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착각하고 오해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나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착각과 오해이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내 인생에 고생과 수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생하지 않게 하려고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백성으로 세우기 위해 도우시는 것이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던 것처럼,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실패와 고난과 고통 역시 우리의 신앙을 위한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멘하는 성도가 되라.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에 상관없이 우리를 도우신다. 지금 혹시 좋지 않은 상황 가운데 계시는 분이 있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신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우리의 신앙을 위해 일하시며 우리를 돕고 계신다>는 것이다. 여러분, 압살롬의 형통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형통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에 맨발로 도망치는 다윗의 실패가 곧 하나님의 외면이 아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세상일의 성공과 실패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판단하지 말라. 우리가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상관없이, 지금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하루를 살아도 믿음으로 사는 성도가 되라.
둘째, 힘을 추구하지 말고 주님의 은혜를 추구하고 의지하라.
아히도벨이 압살롬을 위해서 모략을 내어놓는데, “다윗이 궁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남겨둔 후궁들과 동침하라”(21절)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여자들과 동침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시겠지만,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삼하12:11)는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죄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불러오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어떤 죄를 범했는가? 육신의 정욕을 이루기 위해 왕이라는 권세와 힘으로 밧세바를 취하고, 왕의 권력을 이용하여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다. 육신의 정욕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세상의 힘을 사용하게 된다. 압살롬과 아히도벨 역시 다윗왕이 했던 것처럼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힘으로 연약한 여자 열 명을 희생시킨다. 그런데 힘으로 열명의 후궁을 욕보인 목적이 무엇인가?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순간, 압살롬은 다윗의 분노와 미움을 사서 다윗과 압살롬은 화해할 수 없는 관계가 될 것이고, 이것은 압살롬의 반역에 동참한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압살롬으로 하여금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게 하려는 아히도벨의 계략은 <압살롬의 왕권을 굳게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즉, 아히도벨의 지혜는 힘을 추구하는 지혜이다. 압살롬의 세력을 안정시키고, 압살롬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힘의 논리로 연약한 열 명의 여자를 희생시키는 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세상의 지혜인 것이다. 세상은 아히도벨처럼 힘을 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돈이 아닌,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는 고백이다.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께서 돈이나, 건강이나, 성공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어야 한다. 잠깐 있다가 없어질 돈과 건강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심판과 사망을 피하게 하고, 영생을 얻게 하는 은혜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힘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과 은혜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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