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전8:9-17
제목:모순, 뒤바뀐 세상
전도자의 저자인 지혜자는 세상을 주의 깊게 관찰합니다. 그 관찰을 통해, ‘해 아래’ 세상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악과 부조리를 발견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는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 불평등의 문제를 다루는 내용이 비교적 자주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순된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전도자가 지적하는 모순된 현실의 구체적인 증거는 9절부터 시작되는데요. 바로 악한 통치자의 문제였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주장한다는 말은 악한 통치자가 누리는 권력에 의해 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말해줍니다. ‘권력을 쥔 사람이 따로 있고, 그들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을 보았다.’고 현실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력은 백성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일에 사용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그로인해 백성들을 해롭게 하는 부조리와 불의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보십시오. 멀리 가지 않아도 이 나라만 봐도 또 북한만 봐도 얼마나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까? 차마 우리나라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만. 속상하기만 합니다. 더구나 전도서 기자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적인 모순은, 그 악한 왕들이 살아 있을 때에 권력을 휘두를 뿐 아니라 죽어서도 멸시를 받지 않고 도리어 그가 명예로운 죽음을 맞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이렇습니다.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조금 헷갈리는 부분이 있어서 이 부분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다시 찾아보니 이랬습니다. “악인들은 죽어 무덤에 묻히고 그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은 죽은 자들의 악을 다 잊어버리며 죽은 자들은 자기들이 범죄하던 바로 그 도시에서 칭찬을 받으니 이것도 헛된 것이다.”
고대 유대인들은 장례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죽은 후 그 사람의 사회적 명성과 인격에 따라 적절하게 장례되는 것을 아주 큰 복이자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무덤에 묻히지 못하는 죽음은 저주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나무에 달려 죽은자는 저주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전도자는 생각하기를 악한 왕은 죽은 후에 저주스러운 죽음을 맞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현실의 상황은 그와 같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악한 권력으로 사람들을 해롭게 했던 그 악한 왕이 죽은 후에도 명예롭고 화려하게 장사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정의가 어디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뿐 만 아닙니다. 악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너무 쉽게 잊고 도리어 그들이 칭찬받는 모습을 보는 전도자는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10절 말씀을 보면 “자기들이 범죄하던 바로 그 도시에서 칭찬을 받으니 이것도 헛된 것이다” 실컷 악을 행한 왕의 악행이 기억되면서 증오의 대상이 되거나 비난의 대상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그 성읍에서 곧 잊혀지고는 도리어 그를 칭찬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이렇게 악인의 악한 행위가 징벌을 받지 않음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11절입니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전도자가 생각하길 왜 사람들이 서슴지 않고 죄를 짓는가? 악한 일을 하는데도 바로 벌이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한 자들이 악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세상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이지요. 게다가 14절을 보시면 더합니다.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 세상에는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쁜놈들이 득세하고 부자가 되는 세상입니다. 아니 나쁘니 권세를 가지고 부유한 자가 되는 걸까요? 이러한 불의한 세상 가운데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했던 하박국의 외침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모순이고 정의가 뒤바뀐 세상인 듯 합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렇게 한탄하고 절망하고 낙심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요. 이렇게 한탄하고 비판하는 건 세상사람들도 다 하는 일입니다. 오히려 전도자는 이렇게 불의한 세상 악의 문제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기 보다는 현재의 삶 속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지혜입니다.
15절입니다.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여기서 희락이란 세상에서 말하는 유흥에 빠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5:22절에 성령에 열매가 나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분명히 성령님이 주시는 열매중에 희락을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누리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한평생을 사는 동안 오히려 주어진 인생을 만족하고 즐겁고 기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지혜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오 세상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소개하는 많은 학문들이 있고 이론들이 있지만 그들의 이론은 일리는 있는 말들이지만 진리는 아닙니다.
17절이 오늘 말씀의 결론인데요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완전히 헤아리고 이해하려고 하는 생각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내가 다 판단하거나 해결할 수는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즐겁고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 평안과 기쁨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국내외 뉴스들을 보면서, 악한 사람들과 그들의 거짓 때문에 분노와 화가 치밀어 오르고 그래서 마음에 평안을 놓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자녀들도 사업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역사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헤아릴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해할수 없고 납득할수 없는 일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분노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오늘이라는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헛된 일들에 마음을 모두 빼앗기고 그래서 참된 기쁨을 놓치고 살아가는 일은 지혜롭지 못한 모습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주신 삶에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도 주어진 삶의 자리를 관찰하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비판하고 비난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가운데 기뻐할 일들과 즐거워할 일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모순된 세상. 뒤집어진 세상 이해 안되는 세상 가운데서도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가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이 세상 속에서 그 은혜를 느끼며, 감사하는 하루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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