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딤후1:9-19
제목: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목회서신이라고 불리는 디모데후서는 사도바울이 쓴 13권의 성경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쓴 마지막 서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디모데전서를 쓴 후에 얼마 후에 디모데후서를 썼는지 정확히 알순 없지만 디모데후서는 디모데전서 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서 쓰여진 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두 번 감옥에 갇혔는데요. 첫 번째 감옥은 가택연금 수준이라 자유로운 왕래와 설교와 성경공부가 가능할 정도였습니다. 밖으로 나가지만 못했을 뿐 친구들의 왕래가 자유로웠고 교제가 가능한 어찌보면 감당할 만한 수준의 고난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는 마음으로 옥중서신을 썼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디모데 후서는 두 번째 옥에 갇힌 상황속에서 쓴 서신입니다. 바울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순간이 찾아 왔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고 나서 “이제 곧 죽을수도 있겠구나” 이런 마음으로 쓴 책이 디모데후서입니다. 역사학자들은 AD 64년 7월 경 로마 대화재가 일어났는데요. 네로 황제가 모든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렸고 네로의 명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이 되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검거되고 순교당하는 상황에서 사도 바울도 긴급체포되서 감옥에 갇힌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가죽으로 된 성경을 가지고 오라고 하고 겉옷을 가지고 오라고 하는거 보니까 짐도 못 챙기고 급하게
감옥에 투옥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럴 일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바로 긴급체포 돼서 감옥에 투옥 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택연금이라 그냥 일반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투옥은 지하감옥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혹시 성지순례로 가보셨습니까? 사도바울의 투옥장소를 검색해 보면 지하 2미터 정도의 구덩이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에게는 이 환경적인 어려움보다 더 슬픈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변 사람들의 배신입니다. 오늘 본문인 1장 15절을 보시면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니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그동안 바울 주변에는 늘 동역자와 성도들과 전도대상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늘 바울을 섬기는 가정들과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다 바울을 떠났습니다. 그랬겠죠? 지금 역사에 없을 만한 강력한 네로의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도바울 옆에 있다가는 함께 감옥에 투옥될 것이고 함께 죽을 것이 분명했기에 사람들이 다 바울을 떠나갔기에 사도바울에게는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보다 지금 옆에 아무도 없다는 이 슬픔이 더 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의 인생을 돌아보고 함께 했던 동역자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형집행이 다가오고 그 소식을 듣고 힘들어할 디모데를 향하여 마지막 편지를 씁니다. 이것이 디모데후서입니다.
그 주제가 “함께 고난을 받으라.”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어제 모멘트에 목사님 설교를 듣고 어떻게 자기 아들에게 고난을 받으라고 할수 있을까? 과연 나는 그럴수 있을까? 이렇게 쓰셨더라구요. 네 맞죠? 이건 축복이 아니고 저주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자기의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를 향해 서슴없이 전혀 미안한 감정 하나도 없이. 디모데에게 너는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이 본문을 보면 뭐야? 혼자 죽기 싫어서 그런거야? 나는 망했으니까 너도 망해라 뭐 이런거야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왜 그렇습니까?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마음으로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담대하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아멘 이게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권면입니다. 그런데 성도님들 고난을 받고 이것이 끝이라면 나쁜 부모겠죠? 나쁜 목사님일 겁니다. 결국 이 고난은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 우리 예수님 나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다가올 이 고난은 끝이 아니라고 합니다. 내일 토요일과 주일의 본문이지만 2장에 보시면
병사로써 경기하는 사람으로써 농부로써 최선을 다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들은 땀 흘려 수고합니다. 그 뒤에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병사에게는 전리품이 경기하는 자들에게는 승리의 월계관이 농부들에게는 풍성한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절제하고 힘든 연습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땀흘려 수고합니다.
우리들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우리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 구원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져 받았지만 구원 이후의 삶에는 반드시 고난과 환란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말씀하셨습니까? 바로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이 있을찌도 모른다. 그러니 조심하고 피하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고난이 있을 것이다. 잘 이겨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에는 환난과 고난이 필수 코스이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것 고통스러운 것 세상이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새생명을 얻어 예전과는 비교할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고난을 영광이라고 표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같은 디모데에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나와 함께 고난을 받자. 라고 당당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9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리고 짧게 그 복음을 설명하는데요.
10절입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아멘 그 복음으로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썩을 것에서 썩지 아니할 영원한 것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 이후 우리들이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복음을 믿는 것이고 그 복음을 지키는 것이고 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11절에서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아멘. 그래서 14절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우리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게 어찌 선교사와 목사와 직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겠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복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이제 복음을 믿고 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예수님이 맡겨 놓으셨다고 하고 그 사명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지키는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님들 복음은 부자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부자된다는 것이 어떻게 고난이겠습니까?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질병이 해결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고 가족이 화평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복음은 고난이고 복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것이고 복음은 세상의 질서와 세상의 가치를 거스리는 것이기에 세상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바보라고 손가락질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고통이고 환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음이라서 복된 소식을 원하지만 그 복은 세상에서 말하는 복이 아니라 영적인 세상에서 의 복 즉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고 성도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죽음을 직감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낙심하지 말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어떤 사람들처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에게 주신 사명대로 이 복음을 자랑스럽게 그리고 복음으로 인한 고난과 환난을 함께 이기자 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우리도 복음에 빚진 자로써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되기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들만 좋은 교회가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덕을 보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특히 5월 가정의 달을 맞이 하여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우리들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자녀들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 기독교를 믿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통해 기독교를 믿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피하고 환란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담대히 하나님과 함께 이겨나가는 모습을 보고. 그 삶이 대체 어떤 삶이 기에 고난 마저도 환란마저도 기독교를 포기하지 않게 만들까를 고민하면서 우리를 지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 사도바울이
지금 디모데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처럼 복음의 아름다운 것을 단단히 지키는 우리들 되길 소원합니다. 이 고난 끝에는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이 어려움 끝에는 지금의 고난과 고통과는 비교되 되지 않을 눈물도 없고 아픔고 없고 슬픔이나 고통이 없는 그 찬란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성도님들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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