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느9:23-38
제목: 후회가 아닌 결단하는 성도가 됩시다
지난 시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가운데 지난 날을 회상하는 찬양의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 첫 부분이 모세 오경이었다면 어제 본문은 출애굽 이후를 그리고 오늘은 여호수아와 사사기, 그리고 그 이후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찬양은 그들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성경의 내용을 요약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내용을 봐도 어제의 출애굽 1세대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선배들의 역사를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고 그 땅을 그들에게 주셨으며 하늘과 땅의 것으로 채워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또다시 교만하여 불순종의 반역을 범했고 우상숭배의 음란한 죄로 하나님을 노엽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대적들의 손을 통해 그들을 치셨으나 그것은 그들을 돌이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환난 가운데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셔서 다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평강을 얻은 후에 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기를 밥먹듯이 반복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등졌으며 심지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주님을 심히 모독했습니다.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그들의 악함은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열방 사람들이 손에 넘겨주시는 심판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고 그들은 포로로 끌려가는 수치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사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고 버리지도 아니하셨고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이 찬양하는 것처럼 31절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니 우리들은 이렇게 반역적인 불순종의 범죄를 반복하는 걸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원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욕심이고 두 번째는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은혜와 복을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은혜와 복을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언약에 성실하신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과의 언약에 성실하여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민족으로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합당하게 살아가며 열방에 살아계신 한 분 하나님을 나타내는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자신들의 정체성과 사명은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그저 즐기기만 했으며 더욱 욕심내었습니다. 그것도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복에만 몰입했습니다. 그러니 그 욕심이 그들의 눈을 가리운 것이지요. 눈이 가리니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죽은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가 복을 주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가나안 족속들처럼 우상을 숭배하고 탐욕과 거짓과 음란 가운데 죄를 짓고 만 것이지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야고보서 1:15의 말씀처럼 그 욕심이 죄를 낳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징계를 받고 만 것입니다. 그들의 죄로 보면 죽는 것이 마땅하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사 진노 중에도 자비를 베푸셨기에 그들이 살아남아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교만했습니다. 29절 말씀처럼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경계하셨으나 그들이 교만”했습니다. 교만한 자들의 특징은 듣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내가 옳다는 것이지요. 내가 주인이고 내가 왕이라는 교만입니다. 그러니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결국에는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일 뿐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이건 이스라엘 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상황도 이스라엘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의 출애굽기를 돌아보면 우리 역시 욕심과 교만으로 인해 반복적인 죄 가운데 있었고 그래서 넘어지고 고통을 겪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럴때에는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었지만 그 후 평안해 졌더니 얼마나 교만했습니까? 이제 먹고 살만해 져서 더 이상 기도하지 않습니다. 고3 자녀가 없으니 더 이상 기도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인간은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모든 것을 인간이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교만했습니다. 교만하면 듣지 못합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자연의 경고가 있었고 전문가들의 경고가 있었고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신 말씀이 있었음에도 듣지 못했고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코로나로 온 세상을 꽁꽁 묶어 두셨습니다. 이 코로나 언젠가는 끝나겠지만 이러한 인간의 탐욕과 교만을 깨닫고 돌이키지 않으면 또 다시 이러한 재앙이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든 인류 전체든 욕심과 교만을 다스릴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29절에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신명기 10:13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고 참된 행복을 얻는 길은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그 명령과 규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순절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 없이 안되는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그 마음은 자신을 낮추는 겸손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예수님만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안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주님의 마음을 부어주십니다. 성도님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지막 절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라고 하나님께 아룁니다. 다시는 반역적인 불순종의 죄로 인해 이러한 고통과 수치를 당하지 않겠노라는 다짐이고 자신들의 이름을 적어 인봉하여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 다짐을 실천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다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설령 다시 넘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인답게 믿음과 순종과 사랑과 겸손의 길을 가겠노라는 다짐이 있어야 할 것이며,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마다 확인하고 주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고 그때가 좋았지. 라고 하거나 아니면 그 때 왜 그랬을까? 후회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그래 하나님께 돌아가자~ 더 자주 하나님을 뵈옵고 더 자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가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성도님들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가 있길 소원합니다. 지난 삶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 하나님과의 결단의 시간을 가지시고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지시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줄 아는 사순절과 우리의 인생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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