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느2:1-10
제목: 보이지 않는 손
‘위로하시는 하나님’ 이라는 뜻을 가진 느헤미야는 고위공무원입니다.
왕의 생명을 담당하는 음식을 확인하는 확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역할입니다. 이 느헤미야가 친동생 하나니가 전해 준 예루살렘 성읍이 재건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는 소식에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던 느헤미야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웃기죠? 한번도 가보지 못한 느헤미야가 고국의 소식을 듣고 금식까지 합니다. 우리들이야 한국에서 왔기에 한국 소식에 대해서 화도 나고 눈물도 나지만 느헤미야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그 상황에서도 슬픔을 공감합니다. 아마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느헤미야에게 준 부모님의 영향일꺼라는 예상만 할 뿐입니다.
하나니가 예루살렘에서 찾아온지 4개월 시간이 지나던 때, 왕의 곁에서 술을 따르던 느헤미야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왕이 봅니다. 구약 학자들은 이 어두운 표정을 느헤미야의 계획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고대 페르시아의 연회에서 왕이 신하의 요구를 들어줘야하는 관례를 이용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것이지요. 6절 전반부에 보면 왕후도 함께 있었던 술자리라는 것은 연회임을 뒷받침 하는 근거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러한 계획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느헤미야의 어두운 표정은 느헤미야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오해를 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왕은 느헤미야를 보고 “수심이 있느냐”고 묻지만, 이에 대한 속마음은? ‘악한 마음’이 네 안에 있느냐”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느헤미야는 두려움 속에서도 작심하고 자기의 고향 예루살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습니다. 이게 참 어려웠던게 아닥사스왕은 예루살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아닥사스왕의 명령 때문에 예루살렘의 재건이 멈추었다는 내용이 에스라 4장 21절에 등장합니다. 왕의 뜻이 그러한데 신하가 그 뜻을 돌이킬 수는 없었죠. 언급하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의 수도를 언급하지 않고, 왕의 아끼는 신하였던 자신의 조상들이 묻힌 곳을 강조하면서 왕의 은혜를 구합니다. 왕도 느헤미야의 어두운 표정이 반역과 같은 자신에 대한 적대심이 아님을 듣고서는 느헤미야의 청을 들어줍니다. 기다리던 순간이 왔지만 느헤미야는 바로 자신의 목적을 말하지 않고 기도합니다. 4절 “곧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먼저 앞서 간절히 금식하며 기도드리던 느헤미야 였지만 하늘의 하나님께 다시 한 번 짧은 순간이지만 기도들 드리고 나서야 자신의 뜻을 왕에게 요구합니다.
자신을 좋게 본다면 조상이 묻힌 유다의 ‘그 성읍’에 가서 성읍을 재건하게 해달라는 부탁이지요. 왕은 “얼마나 걸리느냐?”는 질문에 아끼는 신하에 대한 애정을 담아 물으며 느헤미야의 소원을 들어줍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계획을 착착 진행합니다. 앞서 왕이 중단시킨 예루살렘 성읍을 재건을 계속하기 위해 공적인 문서를 요청하고, 재건을 위한 여러 건축재료까지도 왕의 명령으로 준비합니다. 이러한 완벽한 계획의 이행은 느헤미야의 지혜이기도 하지만 8절 후반부에서처럼 삶의 모든 순간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느헤미야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페르시아 왕을 통해 느헤미야에게 호위까지 붙여서 그의 걸음을 보호하셨습니다.
성도님들 예루살렘 성벽재건은 느헤미야 한 사람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 느헤미야는 그것을 따르고 실행하는 역할일 뿐입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힘들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응답과 순종이 있을 뿐이지요.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담대함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10절에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느헤미야가 왔다는 소식에 산발랏과 도비야가 심히 근심한다는 내용으로 오늘 본문이 끝이 납니다. 토요일과 주일본문이지만. 느헤미야는 왕의 친서를 가지고 있음에도 정치적이고 세상적인 것으로 대적들을 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한다는 선포를 통해 대적자들을 물리칩니다.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은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그리고 종교적인 전통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해 도전하겠지만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뜻인 예루살렘의 재건을 막을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느헤미야의 행동 가운데 있는 지혜를 배우기 원합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일상에서부터 하나님의 일을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듣고 크게 낙심했지만 당장 삶을 내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달려가지 않고 기도 중에 주님의 뜻을 기다리면서 준비합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리건 기도하면서 준비하고 또 기도하는 그러한 가운데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민감한 영적인 안테나를 세우고 있어야 그것이 주님의 뜻인지 내 욕심인지 구별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어느 순간이고 기도를 그치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안 사람은 넋놓고 기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고 더욱 담대히 자신의 일을 감당하는 자리에 섭니다. 기도한다고 하나님께 던져놓는 것 아니라 함께 이루어내는 것이 기도의 본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기도를 이루게 하시는 분이시지요. 기도로 인내하며, 슬픔을 다짐으로 바꾸며,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는 느헤미야의 신앙을 따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담대히 실천하는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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