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스10:16-44
제목: 성도의 신앙개혁
첫째,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면 신앙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
제사장의 무리 중에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람들이 있었다.(19절) 그들은 에스라의 지시대로 자기들의 아내를 내보내기로 하고, 그 죄로 인해서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로 드렸다. 여기서 “속건제”란 부지중에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여기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①이들이 이방여인과 결혼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저지른 죄>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 적용할 수 있다. ②이들이 이방여인과의 결혼을 그렇게 심각한 큰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해석을 할 수 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를 아시는가? 속죄제는 하나님의 뜻인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범한 죄가 뚜렷이 드러난 것에 대해 드리는 제사이고, 속건제는 부지중에 지은 죄를 알고 나서, 그게 죄인줄 몰랐다며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경우이다. 에스라는 이방여자와의 결혼문제를 놓고 옷을 찢으며 그토록 통곡하고 슬퍼하며 금식하고 회개하는데, 이들은 통회자복하며 죄를 용서받으려는 속죄제가 아닌, 모르고 저지른 실수와 허물이라며 속건제를 드렸다는 부분에서,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에 대해서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큰 죄인지 깨닫지 못하고,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지 못함”이 원인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 없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다,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씀한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세상의 것을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 참된 신앙의 개혁이 일어나려면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말씀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면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살기에 신앙의 개혁은 일어날 수 없다.
둘째, 신앙개혁은 교회생활을 넘어 가치관의 변화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본문에 이름이 언급된 113명을 통해서 생각해 볼 점은 “당시에 성전이 재건되어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드리면서도 이방인들과의 결혼하는 범죄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성전에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는 드리는데, 삶 속에서는 말씀대로 살지 않고 오히려 불순종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 성전이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하게 지었다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리 각종 다양한 제사를 율법대로 지키며 드렸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예배가 될 수 없다. 겉으로 보이는 예배는 잘 드리는데, 이방여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말씀을 무시하며 살았다는 것은, 겉으로는 하나님 백성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속사람의 사고방식이 하나님 백성답지 않음을 보여준다. 신앙생활은 겉으로 보여지는 교회생활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헌금 잘 한다고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진실된 주님의 양은 주님의 목소리,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말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여 나의 원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원하심을 따라가는 내면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교회는 나오지만, 예배는 드리지만, 이러한 변화가 없이 여전히 세상의 것과 육신의 것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교회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니다. 참 믿음은 세상을 포기하고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는 가치관의 변화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13:44) 천국을 발견한 사람은 육신의 것과 세상의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가치관의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다.
셋째, 신앙의 개혁을 위해서는 그 어떤 아픔과 희생도 감수해야만 한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113명은 이방여자와 결혼한 사람들의 명단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방여자와 갈라서기로, 이혼하기로 결의한 자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들은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정든 아내와, 사랑하는 자녀와 헤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아픔과 희생을 감수하고 신앙개혁에 동참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한 것이다. 본문이 주는 교훈은 “성도는 믿음을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위해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다. 심지어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까지도 번제로 드리고자 했다. 또한 모세는 믿음을 위해서 애굽의 모든 부귀영화를 포기했다. 또한 예레미야는 결혼을 포기했고, 호세아는 창녀 고멜과 결혼하기도 했다. 또한 사르밧과부는 먹고 죽을 마지막 한 움큼의 밀가루까지도 기꺼이 엘리야 앞에 내어놓았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믿음의 가치>는 어느 정도인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것을 어느 정도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시는가? 십자가의 보혈로 값없이 구원과 영생을 얻은 성도는 더 이상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인간관계보다 더 귀하고, 육신의 고난보다 더 귀하다. 믿음은 하나님을 일등으로 모시고 사는 삶이다. 믿음이 세상 것에 밀리고, 육신에게 밀리고, 가족에게 밀려서 3등, 4등이 된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 것을 잃어버릴지라도, 육신에 손해가 나는 일이 일어나도, 가족간의 관계에 아픔이 있을지라도, 믿음을 위해서 어떤 아픔과 희생도 감수하는 성도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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