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빌3:1-9
제목:주 안에서 기뻐하는 삶
첫째, 자기육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에게 참된 기쁨이 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2절) “삼가라”는 말이 3번 반복되는데, “삼가라”의 뜻은 “주의하다, 조심하다. 관찰하다”이다. 개들을 주의하고, 행악하는 자들을 주의하고, 몸을 괴롭게 하는 일을 주의하라는 것이다. 사실 사람을 가리켜 “개”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욕이며, 상대방을 모욕하는 말이다. 그런데 바울이 그런 말을 서슴없이 사용하는 것은, 그들의 사고방식 자체가 교회와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개”는 종교적으로 부패하거나 악한 자, 또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교회의 거룩함을 더럽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행악하는 자”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장해서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몸을 상해하는 일” 즉 손할례당은 할례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세 부류의 공통점은 <육체를 신뢰하는 것>이다. 3절에 육체를 신뢰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를 신뢰하는 교만>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를 신뢰하는 그들의 사고방식은 복음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으로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가장 큰 대적이다. 믿음은 자신감이 아니다. 믿음은 자기가 죄인이며 한계가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자기를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만 신뢰할 때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하는 자에게 참된 기쁨이 있다.
3절 마지막에 바울은 “우리가 곧 할례파”라고 말한다. 할례는 육신을 베어버리는 행위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는 진짜 할례는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바르게 의지하려면 육신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진정한 믿음은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면서, 자신 역시 육체적인 조건으로 따지면 누구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5-6절) 바울의 육신적인 조건은 유대사회에서는 자랑할 만한 것들이고, 누구보다 큰소리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육신적 조건에 대해서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이며, 배설물처럼 여긴다는 것이다.(7-9절) 왜인가? 그런 조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동행하고 의지하는데 대단히 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육신적 조건들이 자신에게 행복과 구원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의지하고 자랑했던 육신적 조건들이 자기를 파멸로 이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육신을 의지하고 자랑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그것들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은 육신적 조건이 누구보다 뒤지지 않았기에,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내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랑하며 살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결코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음을, 육신을 의지하고 행위를 의지하다가는 정죄와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의 육신적 조건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십자가의 의를 붙드는 삶을 살았고, 그때부터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인해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게 된다. 그래서 무엇을 버려야 하며,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럴 때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 매일매일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하심으로,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주님의 은혜만 붙잡고 사심으로 항상 기쁨이 충만한 성도가 되시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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