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사6:1-13
제목:소망의 사람이 되려면
첫째.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다.
웃시야 왕이 죽은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다.”(1절)는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1-4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여러분, 사람이 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을 너무 작게 여기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 병을 고칠 수 있으실까? 하나님께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실까? 아마 못하실거야.”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너무 작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충할 수 있는 다른 존재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소망이 끊기고 위기가 찾아온 순간에도 웃시야 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여러분의 삶에도 어려운 순간이 닥치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고 위대한 분이신지를 다시 바라보라.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힘이 되어 주셔서, 우리 인생을 절망에서 소망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다.
둘째. 자기의 죄악을 깨닫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다.
종교개혁가 칼빈은 인간에게 두 가지 지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요, 또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 반면에 하나님을 알게 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처음에 유다가 위기에 처한 이유가 웃시야 왕의 죽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후에는 유다의 위기가 자신의 속에 있는 죄악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나온 반응은 “나는 망하게 되었다. 나는 부정한 사람이다”라는 것이었다.(5절) 즉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추하고 더러운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사야가 더럽다는 것은, 이사야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가 다 더러움에 빠져 있음을 의미한다. 여러분, 더러움에 대한 결과가 무엇인가? 영원히 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샤아가 자기의 더러움을 보게 되고 자기의 더러움을 고백하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6-7절에 천사를 명하여 제단숯불을 입술에 대시면서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은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회개하는 자는 깨끗함을 받는다. 주님은 회개하는 자의 인생을 바꾸어주신다. 누구라도 자신의 죄와 부족을 고백하면 주님은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신다.
셋째. 사명을 깨닫고 붙드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발견할 뿐 아니라, 또한 사명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사명의 자리로 부르셨다. 그런데 본문을 유의해서 보시면, 8절에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실 때, 두 가지를 질문하신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질문에는 “어디로”가 빠져있다. 그런데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에 순종하자, 하나님은 그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말씀해주셨다. 유다백성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말씀이었다.(9-13절)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네, 순종하겠습니다.”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를 고민한다. 연말이 되면 어떤 분들은 다음해 교회봉사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내가 어느 부서로 가서 봉사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또 어떤 분은 “내가 어느 구역에 가게 될 것인가?”를 고민한다. 우리는 늘 “어디로”의 부분이 걸린다. 왜인가? <어디로>를 내가 결정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고민해야 할 것은, “어디로”의 문제가 아니다. 부르심과 사명에 있어서 뱡항보다 <순종>이 중요하다. 일단 순종하면 방향은 저절로 알게 된다. 창12:1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어디로 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냥 “보여줄 땅”이라고만 하셨다. 어디에도 하나님이 가나안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저 창12:4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라고만 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어디로 갈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부르심에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소망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사명을 붙드는 자에게는 소망이 주어진다. 사명은 내가 왜 사는지를 알려준다. 사명이 희미하면 인생의 목표도 희미하기 때문에 장애물에 부딪힐 때 낙심한다. 그러나 사명이 분명하면 목표도 분명하기 때문에 장애물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고 뛰어넘는다. 그러므로 사명을 발견하고 사명을 이루는 소망의 사람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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