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민수기 9:15-23
제목: 구름 네비게이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드디어 성막이 완성이 되었고 성막을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의식인 기름부음도 마쳤습니다. 또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제사장들의 위임식이 끝나고 모든 레위 족속에게 하나님의 임무가 부여됐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레위인을 위한 위임식도 끝이 났습니다. 그러자 오늘 본문 15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16절 “항상 그러하여” 성도님들 광야가 어떤 곳입니까? 물도 없고 낮에는 50도를 넘나드는 고온이, 밤에는 7도에서 영하까지 떨어지는 일교차가 무려 50도 정도 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 200만명이 진을 치고 살고 있어도 아무도 시비거는 족속이 없습니다. 왜요? 그 땅은 쓸모 없는 땅이니까요?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낮에는 에어컨이 밤에는 히터가 작동하는 최첨단 은혜를 누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고 40년간 의복과 신발이 헤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지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막은 다른 제단과는 전혀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세운 성막은 움직이는 이동식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성막을 만들 때 그리고 레위인에게 임무를 부여할 때 하나님은 철저하게 이 성막이 이동될 것을 전제하여 그들에게 임무를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명령하시면 성막을 해체해서 짊어지고 가고 하나님이 멈추라고 하면 다시 성막을 설치하는 작업을 반복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제 움직이고 언제 멈췄을까요?
17절이 그 내용인데요 구름기둥이 성막 위에 덮인 채로 가만히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행군을 중단하고 그곳에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구름이 떠오르면 행군을 시작하여 그 구름이 가는 대로 따라갑니다. 가다가 구름이 다시 머물면 바로 그 자리에 진을 치고 다시 머뭅니다. 구름이 금방 떠오르면 금방 떠났지만, 구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진을 친 그곳에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일 년이고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구름이 떠오르는 때까지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달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간 걸어갔습니다. 참으로 인간적으로 볼 때 답답한 행군이었습니다. 특히 성질이 급한 한국인들은 도저히 받아드리지 못해서 화병 때문에 죽을 만한 명령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이 볼 때 전혀 납득 할 수 없는 비효율적인 행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특별히 오늘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들어야 소중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름이 떠오르는 때를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럼 모든 삶을 멈추고 그저 구름만 그냥 하늘만 바라보라는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내일 본문인데요 하나님은 은으로 나팔을 만들어 구름을 관찰하는 파수꾼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나팔을 불면 준비를 하고 또 나팔을 행진을 하는 그런 삶을 삶았습니다. 이 “구름이 움직여야 한다는 말씀”은 인생은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만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전진을 원합니다!! 아마 현대에서 그냥 멈춰 있다면 무능하거나 삶의 의욕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할 것입니다. 이 현대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은 앞으로 나가기를 원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이라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었습니다. 전진은 바로 그 목적을 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집도 짓고 농사도 짓고 정착해서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목적이 바르다고 해도 내 마음대로 전진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민수기 광야의 삶입니다. 아무리 잘 나가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고 조금만 더 가면 더 좋은 거 처가 있고 맑은 물이 보일 찌라도 구름이 머물면 머물렀습니다. 풀도 있고 물도 있어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을 짓고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떠오르면 따지지 말고 묻지 말고 떠나야 했습니다.
성도님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기도하고 말씀 듣고,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출발 신호를 듣고서야 전진하고 계십니까? 성경은 온통 순종할꺼냐 아님 불순종할꺼냐?를 묻는 책입니다. 순종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와 불순종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순종하면 형통이고 불순종하면 고생입니다. 그러니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순종해야 합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계산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 이것이 지혜입니다. 그럴 때에만 하나님은 우리 삶을 진리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는 사도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호송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 보면 바울의 일행이 탄 배가 미항이라는 항구를 떠나려할 때 바울은 이 배가 출항을 중지해야 한다고 호송책임자에게 말합니다. 여기에 머물러 겨울을 나야한다고 간청했습니다. 바울이 자기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호송책임자는 선장과 선주의 말만 듣고 배를 출발시킵니다. 선장은 "나는 지중해를 손바닥처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큰 소리 쳤고, 선주는 배를 지체 시켜서 한 시라도 손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머물러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지만 저들은 떠났습니다. 처음 배가 떠났을 때 순풍에 돛을 달았습니다. 하늘은 쾌청하고 바람은 잔잔했습니다. 선장과 선주는 물론 호송책임자는 의기 양양 했습니다. “그래 우리 판단이 옳았어! 이렇게 날씨가 좋지 않는가?” 그러나 얼마 못가서 섬 가운데로 유라굴로 라는 광풍이 휘몰아 쳤습니다. 큰 태풍으로 인해서 배가 더 이상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머물라고 하셨을 때 그 말씀을 거역하고 배를 띄웠던 저들! 처음에는 순풍에 돛을 달았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얼마나 좋은 날씨인가 자화자찬했지만 했지만 얼마 못 갔습니다.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결국 배는 파선 당하고 말았습니다. 머무는 것은 손해처럼 보입니다. 괴롭고 고달플 수도 있습니다. 머물러 있으니 한없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실패해서 물러서 있으니 절망과 좌절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님의 깊으신 은혜가 있고 보다 큰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지난날의 어려움과 고통과 늦어진 데에는 하나님의 크신 뜻이 계셨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를 호렵산 기슭에서 40년 동안이나 머물게 하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님들 중요한 것은 전진이냐? 머무느냐? 가 아닙니다.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닙니다. 지금 누구의 명령을 따랐느냐? 누구와 함께 하느냐? 입니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 살아가느냐?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만 하면 전진하면 전진해서 좋고 머물면 머물러서 좋습니다. 전진에는 하나님께서 보장하는 승리가 있고 머무는 곳에는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더 큰 섭리가 있습니다. 성도님들 인생은 속도가 아닙니다. 방향입니다. 누구를 향하고 있느냐 누구의 말을 듣느냐 누구를 바라보느냐 이것이 우리 인생에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십니까? 그러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참고 기다리며 구름이 떠오르는 때를 바라봤던 모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우리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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