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레 14:21-32
제목: 배려 받을 수 없는 제사
어제 담임목사님을 통해서 나병의 정결의식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정결의식은 8장에 나온 아론의 아들들이 제사장이 되기 위한 제사장의 위임식의 형식과 유사하다고 말씀 하셨죠? 기억나십니까? 기억의 은사가 되살아나길 소원합니다. 제사장도 나병환자도 누군가가 데리고 와서 대신 씻겨야 하고 옷도 갈혀 줘야 하고 털을 밀고 피를 바르고 기름을 바르는 의식이 제사장의 위임식과 나병환자의 정결의식과 동일한 방법으로 진행됩니다. 또 제사장 위임식과 같이 속건제와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를 비롯한 모든 제사의 방식과 방법이 동원되어 완전하게 거룩한 존재로 공동체의 일원으로써의 공동체로 다시 들어갈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나병환자의 정결의식입니다. 이 나병은 현대의 한센병과는 다르다고 설명하셨죠? 이 나병은 위생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탐욕과 욕심과 같은 죄의 결과라면 왜? 이 사람들에게만 이 어려움을 당했겠습니까? 왜 이스라엘과 성경의 역사에만 이 나병이 존재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나병환자들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거죠? 거룩을 갈망해야 하는 우리들을 일깨우실려고 우리 대신 수고하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이 나병환자들의 삶은 얼마나 비참합니까? 진 밖으로 쫓겨나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홀로 살아야 합니다. 통증도 없고 감각도 없습니다. 이스라엘과의 단절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단절이 이들을 제일 슬프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병환자 인 것으로써도 충분히 불쌍한데. 거기에 오늘 본문에 등장한 사람은 가난한 나병환자였으니 아이구 이 사람은 정말 정말 불쌍했겠죠? 하나님은 이런 가난한 나병환자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아멘 당연하죠? 그래서 어제 본문에는 숫양 두 마리와 암양 한 마리와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나병환자의 정결의식을 위해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게 일반적인 나병환자의 정결예물이라면 오늘 본문에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결의식의 제물이 등장을 합니다. 이 얼마나 뭉쿨한 장면입니까? 그래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빡빡한 분이 아니셔?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시는 분이셔? 이렇게 감동할 만 하지 않습니까? 나병환자로 오래 살아서 도와주는 가족도 없고 돈도 없을 가난한 나병환자들을 위해서는 그 제물을 감면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나병환자의 제물로 숫양 한 마리와 세 두 마리가 준비됩니다. 그리고 기름의 십분의 일 에바를 소제로 사용됩니다.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차이가 있긴 있는데. 이상하게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제가 이 본문을 또 보고 또 봐도 이상했습니다. 양 세 마리 대신 비둘기 세 마리로 하자. 이러면 이해가 되고 납득할 만합니다. 안되면 잡아서라도 오면 되잖아요. 그런데 나병의 정결의식을 위해서 숫양 한 마리는 반드시 들어갑니다. 속죄제와 번제를 위해 새를 사용하고 소제를 위해 십분의 삼 에바에서 십분의 일로 그 제물의 양이 줄어 들었을 뿐입니다. 조금 줄긴 했어도. 그리 만만한 제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렇게 베풀다 만 것과 같은 은혜를 주실까요? 이게 무슨 은혜입니까? 여전히 막대한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진심과 그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성도님들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지만 이 제사의 가장 큰 수혜자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제사라는 방법을 통해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 제사는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했죠? 그러므로 그 누구도 예수님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가 가난하든 부자든 존귀자든 평민이든 그 누구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없이는 구원 받을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하 만민에게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가난한 자들은 돌봄을 받아야 하고 가능하면 의무를 많이 지우지 않는게 정의라고 생각할수 있으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정말로 저 사람을 위한다면 완전한 죄의 사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3:23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에 그래서 어 가난한 자는 그냥 약식으로 해도 돼. 애들은 좀 설설해도 되. 대충해도 돼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고 완벽한 제사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자기 아들이신 예수님을 죽이시기 까지 하나님은 철저하게 죄를 싫어 하시고 그 죄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30:15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성경에 이런 구절이 꽤나 많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습니다. 잠언과 전도서에 가난한 자라고 편애하지 말고 부자라고 봐주지 말고. 공평과 정의로 판단하라는 권고가 나옵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인간은 차별이 없어야 하므로 인간이 구원받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가난한 자라 할찌라도 완벽한 이 제사 제도 십자가의 정결의식을 통해서만 나병환자들을 거룩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비록 우리 육신은 건강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영혼은 나병환자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아파도 아픈지도 모르고 썩어도 썩어 문그러므로 우리를 깨끗케 하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일하고도 완전한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의 능력 그 권세로 말미암아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철저합니다. 대충 설렁 설렁이 없습니다. 레위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거룩해 져라가 주제입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깨닫는 바가 있었으면 합니다. 코로나 시대 신앙생활은 어떠신지요? 경제적으로는 좀 어떠신지요? 코로나 시대 우리의 예배 태도는 더 간절해 졌는지요? 아님 설렁설렁 하나님이 이해 하실꺼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거룩해 지는 유일한 방법인 이 제사 그 정신이 살아 있는 예배에 최선을 다하는 그래서 예배 때마다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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