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23:44-56
제목: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장면과 묻히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천년 전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고 무덤에 묻힌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사모하는 우리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죽으심
누가는 복음서를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사건을 처음부터 면밀히 조사해…순서대로” 썼다고 말하는데 그의 말처럼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장면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그 장면을 눈으로 본 많은 증인들의 증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44절을 보십시오.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유대의 6시 보통 낮 12시에는 태양이 오히려 가장 강렬하게 내리쬐기 시작하고 제구시인 오후 3시에는 절정에 이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실때에 마치 해가 그 빛을 잃은 것처럼 캄캄한 암흑이 예루살렘 성 전역을 덮는 것은 자연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결코 일어날 리 없는 현상이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순간 발생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식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유월절인 3-4월은 이스라엘에 일식이 일어나는 때가 아니고, 기갓해야 15분에서 30분인 일식이 정오부터 오후 세 시까지 세 시간동안이나 일식이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라 특별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였습니다. 흑암은 하나님이 통치하지 않는 하나님의 저주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이 달려 있는 십자가를 둘러싼 흑암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계신 하나님은 인자와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나무에 달린 죄인 예수님에게 쏟아졌습니다. 창세로부터 종말까지 많은 사람이 저지른 죄에 대한 지옥 심판이 예수님에게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45절에 일어난 일입니다.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일종의 커튼으로 길이가 15m 정도이고 두께가 약 10cm 정도의 두꺼운 천이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신 장소로 하나님의 율법이 담긴 언약궤가 있던 자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함부로 나갈 수 없어 백성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일 년에 단 하루만 그 휘장을 지나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마 큰 충격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죽으셨다는 것이며,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담대히 휘장을 통과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실 때 말입니다. 히브리서 10:19~20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단번에 영원히 죄인을 향한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마지막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는 47절에 나오는 로마 군병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았고” 4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경하러 모인 무리”가 있었고 그리고 49절을 보시면, 예수님을 “아는 자들” 즉 가까이에서 따르던 무리, 특별히 예수님을 섬기며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 역시 “멀리 서서 이 일을 보았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이름없는 불특정한 증인이 아니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49절에 언급된 “여자들”의 이름을 기록했는데,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또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증인에 의해 목격된 역사적인 사실임을 여러 차례 사복음서가 교차적으로 설명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묻히심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는가? 물어본다면 그 무덤을 보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 당시 십자가에서 처형된 범죄자는 보통 무덤에 묻히지 못하고 다른 죄수처럼 골짜기에 버려져 짐승의 밥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증인이 모두 죽고 나면 예수님의 시신 또는 그 시신이 묻힌 장소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한 사람을 통해 해결하셨는데, 그의 이름은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었습니다. 50절은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셉은 유대인 동네 아리마대 사람으로 산헤드린 공회 의원 중 하나였지만 예수님을 죽이려는 결의에 찬성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요한은 그가 “예수의 제자”였으나 유대인이 두려워 이를 숨겼다고 말합니다.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그는 공회에서는 두려워서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당돌하게”(막 15:43) 그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이번 중고등부 수련회가 주제가 멀찍이 망설이지 말고 당돌하게 예수님을 믿자는 것이었는데요. 이 요셉이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52절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절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빌라도는 예수님의 시신을 직접 받아 깨끗한 세마포로 시신을 쌌습니다. 그리고 자기 소유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넣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누가의 이 표현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 요한은 “새 무덤”이라고 말합니다. 왜 이것이 중요할까요? 유대인, 특히 부유한 사람의 무덤은 큰 바위에 구멍을 내고 그 안에 굴을 만들어 여러 시신을 보관할 수 있는 가족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무덤에 다른 시신이 있을 가능성이 조금도 없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무덤 속에 여러 시신이 있어 예수님의 시신과 혼동할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은 이 무덤은 오직 예수님만의 무덤이었습니다.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 하나만 놓여 있었습니다. 이 말은 이 무덤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오랜 시간 확실하게 증명해줄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어느 날 이 무덤이 비어있는 채로 발견된다면, 수많은 시신 중 누구일지도 모르는 시신 하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요셉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또 성경은 55절이 아주 절묘한 타이밍을 설명하는데요.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 3시경에 돌아가셨고 3시간 후인 금요일 오후 6시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될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안식일에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야 했고 특히 부정한 시신 곁에 가는 것은 더욱더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확인만 하고 돌아갔다가 안식일 첫 날 향품을 바르러 왔다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의 또 다른 숨은 제자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드릴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30kg)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이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혹시라도 제자들이 시신을 몰래 훔쳐 가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 증언할 수 있으니 경비병을 무덤 앞에 배치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바리새인, 경비병 모두 그 무덤에 찾아가 큰 돌로 막힌 무덤에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킵니다. 예수님이 묻힌 곳을 아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누가의 기록을 통해 예수님이 진실로 죽으셨고 진실로 묻히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 사람이 너무 많았고 잊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예수님의 죽음과 묻히심을 입증할 증인과 증거도 충분했습니다. 왜 이게 중요합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이 사실이어야 우리 죄도 사함을 받고 그 후에 예수님처럼 부활도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 어머니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우리 옆집 아저씨의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 그리고 묻히심을 믿어야 그 후에 부활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죽었던 우리들을 예수님께서 몸 찢기고 피흘려 죽으심으로 영원히 단번에 하나님께 나아갈 은혜를 얻은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이 사실을 날마다 확인하고 감사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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