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9:10-17
제목: 빈들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
첫째, 세상은 의지할 것 없는 빈들과 같다.(12절)
12절에“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라는 말씀에서 깨닫는 교훈이다. <빈들>이란“고독한 곳, 쓸쓸한 곳, 황폐한 곳”이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곳>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왜 주님은 <빈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까? 사실 모든 것이 충분한 도시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성경에서 <빈들>은 <사람이 의지할 것이 없는 세상>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숨가쁘게 달리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한다. 돈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같아 돈을 위해 평생을 달려보지만, 사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인생의 목마름은 해결되지 않는다. 목마를 때 바닷물을 마시면 갈증이 더 심해지듯이, 돈은 있으면 있을수록 많은 돈을 원하는 욕심만 커지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빈들과 같은 세상에서 반드시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것은 <또 다시 목마를 수 밖에 없는 샘물>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4:1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을 의지하면 안될 뿐 아니라, 또 세상 의지한다고 해서 도움이 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진정한 도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않고 영원히 만족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 빈들같은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는 성도가 되라.
둘째, 예수님 안에서 하찮은 것은 결코 없다.(13절)
13절“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할 수 없사옵나이다”에서 깨닫는 교훈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오병이어를 하찮게 여겼다. 그것으로는 남자의 숫자만 오천명이나 되는 큰 무리를 먹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큰 무리와 비교해 보니, 자기들 손에 있는 오병이어가 하찮게 여겨진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무엇인가? 주님은 제자들이 하찮게 생각했던 오병이어로 아무 것도 없는 빈들에서 수많은 무리를 배부르게 먹이고도 남길 정도로 채우셨다.(17절) 그 작은 오병이어로 5천명 이상을 먹이는 것은 분명 불가능한 것이었는데, 주님의 손에 오병이어가 들리게 되자, 먹는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분명 환경은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빈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해결된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아야 할 것은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시겠는가? 아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도 알고 계신다. 그러나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주님 손에 들리면 위대한 것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유>가 힘이 아니라, <주님>이 힘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소유의 많고 적음에 낙심하고 무너지는 성도가 되지 말고, 작은 것으로도 큰일을 행하실 수 있는 <주님의 함께 하심>에 목숨을 거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한다.
셋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어야 한다.(16절)
16절“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에서 깨닫는 교훈이다. 여기서 <축사하다>는 말은 감사기도했다는 뜻이고, <하늘을 우러러>는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들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다>는 뜻이다. 주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셨다. 주님이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시고 기도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만왕의 왕이요,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분이신 주님은 굳이 기적을 행할 능력을 달라고 구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다. 그런데 주님은 오병이어나 칠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 반드시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 하셨다. 또한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자 하실 때도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다.(요11:41), 또 주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제사장적 기도를 하실 때에도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기도하셨다.(요17:1) 또한 스데반도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행7:55) 보았다. 왜인가? 하나님의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 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는 말과 <성령충만>은 동일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항상 하늘을 우러러 본다. 우리는 살면서 거의 대부분 땅을 보며 살아간다. 사람을 의식하며 사람을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가 하늘을 우러러 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성도는 시선이 좋아야 한다. 힘들 때나 어려울 때나 모든 상황 속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성령충만을 구하는 성도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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