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왕하 9:30-10:14
제목: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도구
예후는 아합의 집을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세운 사람이다. 즉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은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요람왕을 죽이고, 이세벨을 죽인다. 그렇다면 예후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이므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수 있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첫째,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본문은 예후가 이세벨을 죽이고, 또 아합의 아들 70명을 죽이고, 또 귀족들과 신뢰받는 자들과 제사장들을 생존자 없이 남김없이 죽이고, 또 아하시아의 형제들 42명도 다 죽이는 내용이다. 사실 본문을 대할 때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는 뉴스에서 비행기가 떨어져 수백명이 죽은 사건을 접하면 어쩔 수 없는 사고였기에 안타까워하며 넘어간다. 그러나 만약 어떤 목사가 그 비행기 사고에 대해서“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 벌떼처럼 일어나서“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라고 반발한다. 사람을 죽이는 그런 하나님은 싫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본주의 사상이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존재도 인간을 유익하게 하는 분으로만 정의내린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에 대한 말씀에 대해서는 기쁘게 아멘하지만, 본문처럼 긍휼없는 심판에 대해서는 혼란스러워하고 아멘이 잘 안된다. 그러나 왕하9:6-9의 하나님의 명령은 아합에게 속한 것은 다 멸절시키고 남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한다. 예후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은 사람임은 분명하지만, 그의 내면과 속셈은 온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성경은 예후의 성품이나 심리상태를 분석하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일에만 초점을 둔다. 내일 본문 30절에 하나님은 예후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행했다고 하시면서 그의 후손이 4대동안 왕노릇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주의할 것은, 신앙생활은 내 입맛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맛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신앙생활하면 안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나의 주관적인 생각을 잣대로 삼는 것은 절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본문에 예후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 중에 착한 사람들이 없었을까? 분명 있었을 것이다. 또한 예후는 착한 사람인가?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착하고 나쁜 것이 아니라, 아합의 편에 있는가 아닌가였다.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의 기준과 다르다. 하나님의 일은 내 생각과 내 판단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 내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가 되라.
둘째, 하나님의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는 사람이다.
우리 나라 말에는 사람에 대한 불신이 담긴 말들이 있다.“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다”왜 이런 말이 나오는가? 사람을 믿었다가 배신당하거나 손해본 경험들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주인공인 예후를 보라. 그는 믿을만한 사람인가? 아니다. 그는 자기가 섬기던 왕 요람을 직접 죽였다. 어제 본문에 요람왕은 예후가 찾아왔을 때에 그가 배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마중 나간 것이다. 그러나 예후는 자기를 믿었던 사람을 배반했다. 오늘 본문 9장 32-33절에도 이세벨여왕을 섬기던 내시들이 곧바로 배신하여 자기들이 섬기던 이세벨을 창에서 던져 죽이는 것을 보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다. 또 10장 1절에 이스르엘의 귀족들, 곧 장로들과 아합의 여러 아들을 교육하는 자들이 예후의 말 한마디에 자기들이 양육하던 왕자들 70명을 죽이는 것을 보라. 왕자들 입장에서는 자기를 양육하던 자들이 자기를 죽일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처럼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사람은 신뢰할만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상황과 형편이 바뀌면 언제든지 행동과 태도가 달라질 수 있는 존재이다. 이것은 타인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신뢰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감정은 신뢰할만한 것이 못된다. 상황과 형편에 따라 감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 역시 신뢰하기 어렵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잘못된 것에 속아넘어간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정당하고 당당한 성도로 서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후처럼 자기 이익이 걸리면 신앙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후는 9장과 10장에서 말끝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랬더라고 하지만, 실상 그는 자기 유익을 위해 움직인 사람이다. 그는 왕이 되기 전에는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으나, 왕이 된 후에는 말씀을 따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왕하10:31) 왜 그런 것인가? 결국 자기 유익과 욕망을 위해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람은 신뢰할만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성도는 늘 자기 자신을 살피면서, 사람을 신뢰하지 말고, 오직 영원히 신실하신 하나님 한분만 신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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