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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사랑의교회

2020-4-16 큐티말씀 - 무너질 수 없는 말씀의 권위(왕상13:23-34) 

사무간사22020.04.17 23:18조회 수 160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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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왕상13:23-34

제목:무너질 수 없는 말씀의 권위

 

산수와 수학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산수는 덧셈뺄셈 등만 하면 된다. 그러나 수학은 공식을 모르면 풀 수가 없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이해가 안되는 것이 많다. 특별히 성경에는 이해가 안되는 것이 많다. 만약 제가 성경을 썼다면 절대 이렇게 안 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입장이 아닌, 하나님의 입장에서 쓰여진 계시의 말씀이기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이해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공식을 대입해서는 풀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받을 때 성도가 기억해야 할 믿음의 공식은 무엇인가?

첫째, 말씀을 어기는 자는 누구든지 죽임을 당한다.

23-24절을 보면,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결국 말씀을 어긴 것으로 인해 사자에게 물려 죽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실상 누가 잘못한 것인가? 벧엘의 늙은 선지자 아닌가? 그렇다면 죽어야 할 자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여야 마땅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늙은 선지자는 내버려두고, 하나님의 사람만 죽이셨는가?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우리의 사고방식이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죽음을 좋지 않은 것으로, 불행으로 생각한다. 성도들도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예를 들어, 비행기 사고가 나서 모든 사람이 다 죽었다. 그런데 어떤 일로 인해서 그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하게 된 기독교인이 있다고 합시다. 과연 그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살려주신 것으로 여기지 않겠는가? 모든 사람은 죽었는데 나는 극적으로 그 비행기를 타지 않게 되어 살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자신을 특별히 사랑하는 증표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면 비행기에 타고 있던 기독교인들은 모두 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아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인가? 또한 세상에서 일찍 죽은 자는 죄가 크기 때문이고, 오래 생존하다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착하기 때문인가? 이런 생각은 <죽음은 좋지 않은 것이고, 생존은 좋은 것>이라고 하는 세속적 기준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 하나님의 사람은 사자에게 물려죽고,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멀쩡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람만 심판을 받고 늙은 선지자는 심판을 받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세속적 사고방식이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성공과 실패를 따지는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답을 찾을수가 없게 된다. 24절을 보라. 사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죽였는데, 시체를 먹지도 않고, 그가 타고가던 나귀도 잡아먹지 않았다고 나온다. 이것은 사자가 배가 고파서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시는 메시지선포이다. 마찬가지로, 사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죽인 것은, 단순히 선지자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자는 누구든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다>는 메시지이다. , 벧엘의 늙은 선지자와 여로보암과 북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고 회개의 기회를 늙은 선지자와 여로보암과 백성에게주신것이다. 소식을 들은 늙은 선지자의 반응이 무엇인가? 26절은 한마디로 하면,“말씀을 어긴 자의 끝이 어떠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죽은 것을 보고 슬피 운 것은, 단순히 미안해서가 아니다. 영적으로 보면 자기 자신도 말씀을 어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말씀을 어긴 자의 결국이 어떠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31절에 자기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이 묻힌 곳에 자기도 거기에 묻어달라고 한 것은, 자기의 결국이 하나님의 사람의 결국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도 말씀을 어긴 자로서 부끄러워하며 하나님의 사람과 같은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을 안 것이다. 늙은 선지자는 이것을 깨닫고 슬피 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씀안에 사는 성도의 모습이어야 한다. 십자가는 말씀을 어기며 살아가는 사람의 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말씀을 업신여기며 사는 우리의 끝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를 보면서도 심판받아야할 자가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한 애통함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로보암처럼 말씀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다. 말씀을 어기면서도 애통이 없다면 나의 끝은 여로보암의 끝과 같게 될 것이다. 말씀 앞에 늘 애통하고 회개하는 심령이 되라.

둘째, 말씀의 권위는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달려있지 않다.

24절에 보면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말씀대로 행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사자에게 물려 죽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사람이 비참하게 죽게 되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가? 그가 전한 말씀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었을까? 우리는 보통 목회자의 품행과 삶의 결과를 통하여 그가 전한 말씀을 판단한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컵이 더러우면 컵속에 생명수가 담겨 있어도 사람들은 입에 대지 않는 것처럼, 말씀을 전하는 자가 문제가 있다면 그가 전하는 말씀이 신뢰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권위는 사람에게 달려있지 않다. 사람은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다. 어제 본문 20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한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 임하셨다. 무슨 생각이 드는가?“어떻게 거짓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수 있지?”이런 생각이 당연히 들지 않겠는가? 우리의 사고방식 속에는 어떤 생각이 있는가?“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사람이라면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이어야 하지 않는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머리속에는 말씀을 받은 사람이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이 권위가 있다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착각이다. 어떤 착각인가? <말씀의 권위가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달려있다>는 착각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부족하면 말씀의 권위도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큰 착각이고, 대단히 큰 오류이기도 한다. 만약 말씀의 권위가 말씀 전하는 자에게 달려있다면,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말씀을 주실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누구도 말씀을 맡길만한 의로운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을 거짓으로 속인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은,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 잘못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이 그를 도구로 삼아 말씀을 나타내시고자 하는 것뿐이었다. 성경에 그런 사람이 두 명 있다.“요나, 발람이 두 사람은 분명히 문제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엘리제사장도 있다. 그는 문제가 많았지만, 하나님은 엘리의 입술을 통해 한나에게 자식이 있도록 선포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씀을 전하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자기의 의로움을 삼으면 안된다. 말씀을 전하는 목사, 구역장, 성경공부리더들도 자신이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곧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벧엘의 늙은 선지자와 다를바 없는 연약한 죄인일 뿐이며,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굳게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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