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 호심경(엡6:101-4)
▶어떤 학생이 수업받는데, 선생님께 문자가 왔다. “야, ㅇㅇ보고 수업끝나자마자 바로 1층 교무실로 오라고 해라”“네 전해줄께요”그러자 선생님의 문자가 바로 왔다.“수업시간에 문자보냐? 너도 같이 와라.”선생님이 먼저 문자 보내놓고서는 답장 보내니까 수업시간에 문자본다고 정죄하는 것이다. 이걸 함정문자라고 한다.==> 이걸 예배시간에 써먹어 보면 어떨까요? 예배시간에 집사님들께 문자를 보내요.“집사님, 뒤를 돌아보세요.”그래서 그분들이 문자를 확인하고 뒤돌아보면, 뒤에서 이런 피켓을 보여주는거예요. 예배시간에 문자확인합니까?/그러나 교회가 함정을 파면 되겠어요? 안된다. 왜냐? 함정을 파는 것은 악한 짓이다.
==> 마귀가 하는 일이 바로 함정을 파는 것이다.
마귀는 성도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든 후, 죄지은 사람을 정죄하고 고발한다.
“너 성도 맞아? 너 구원받은 거 맞아? 목사가, 장로가, 권사가, 집사가 왜 그따위로 사냐? 너 하나님의 사람 맞아? 너같은 인간이 무슨 성도냐? 하나님이 너같은 인간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같아?”
왜 그러는 것인가? 죄책감속에서 좌절하게 만들려고 그러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효과만점이다.
“그래. 맞다. 나 같은 게 무슨 그리스도인이냐.”
이런 마귀의 정죄에 사도 바울조차도 넘어진 적이 있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이처럼 마귀의 공격은 엄청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적전쟁에 임하는 성도에게 (14절) 의의 호심경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호심경(護心鏡)은 옛날에 전쟁에 나가는 사람이 적의 칼과 창과 화살로부터 심장을 보호하기 위해 착용하는
방탄조끼같은 것인데, 구리로 만들었기에 거울처럼 번들거리고 빛남으로 “거울 경”자를 써서 호심경이라고
하는 것이다./옛날 호심경의 주목적은 심장 보호이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호심경”은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성도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의의 호심경의 “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신학자들은 이것을 예수의 의가 아닌, 성도의 의로운 행실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다. 물론 여러분 귀에는 그럴듯하게 들릴 것이다
.“맞아. 맞아 하나님의 의도 필요하지만,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아야지.”
굉장히 설득적으로 들리죠? 저도 그 말에 홀랑 넘어갈뻔 했다.
물론 성도는 반드시 의로운 행실을 하려고 힘써야 한다. 더러운 말을 하지 말고,
깨끗한 마음으로, 또한 착하고 선한 행실을 해야 한다.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마귀의 공격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왜요? 인간은 항상 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 왜 하나님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시는가? 인간은 본성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이다./여러분, 꼭 기억하라. 인간은 약하지만, 동시에 악하다. 인간은 약함과 악함을 동시에 가진 존재이다. 그걸 잊으면 안된다.
예전에 불만제로라는 방송에서 우리가 자주 먹는 식혜에 대해 다뤘던 적이 있었다.
찜질방에서 먹는 식혜에 사카린을 넣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카린은 설탕의 200배 단맛을 내는 화공식품이다.
예전에 쥐를 대상으로 사카린을 투여했을 때, 쥐에게 암을 유발시켰다.
그래서 발암물질을 일으키는 대상이 되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설탕을 썼던, 사카린을 썼던간에 상관없이
공장에서 만들어 가져다 찜질방에서 파는 식혜에 엄청난 세균감염이 드러났다.
화장실 변기오염도가 154인데, 식혜보관용기의 오염도가 9453까지 나오는 것이다.
식혜보관 그릇이 화장실변기보다 61배나 더러운 것이다.
발암물질인 사카린을 넣은 것, 그러면서 안넣었다고 거짓말하는 것,
더 심각한 것은 사람 먹으라고 만든 그릇을 화장실변기보다 더럽게 관리하는 것,
이런 모습에 저는 화가 나서 저게 사람의 탈을 쓰고 할 짓이냐고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내가 식당이나 찜찔방 가서 식혜를 먹으면 사람도 아니라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새벽기도때 주님말씀이“그러는 너는? 저사람들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냐?”“네.그렇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주님의 말씀“아니, 너도 은혜 떨어지면 오십보백보다. 생각 안나냐? 너는 미친 개였잖아?”
여러분, 절대로 여러분 자신을 신뢰하지 말라.
저와 여러분은 기회만 생기면, 환경만 조성되면 언제든지 엄청난 죄를 서슴없이 지을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라. 자기 가족을 살인청부하다가 붙잡혀서도 당당한 남편이 있었다.
세상에 누구를 믿을 것인가? 인간은 연약하지만, 동시에 악하다.
인간의 의는 절대로 마귀의 공격앞에서 힘을 발휘할수 없다.
마귀의 공격앞에서 우리가 의지해야할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의”이다.
이 의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주어진 의가 아니라, 오직 선물로, 은혜로 주어진“의”이다.
우리는 의롭지 않은데, 우리는 여전히 죄인인데,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이다.
이것을“칭의”라고 한다./옆: 당신은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이“칭의”의 효력이 무엇인가? 롬8:33-34을 보자. 무슨 뜻인가? 두가지이다.
1)성도는 고발당할 일을 했다는 뜻이다. 맞죠? 죄를 지으니 고발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2)누구도 우리를 고발할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고발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오늘날도 고발당할만한 일을 한다. 죄를 짓는다. 그런데 마귀가 우리를 고발하는 고발이 성사되지 않는다.
왜요? 우리가 우리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 즉 십자가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김을 받았기 때문이다.
34절은“우리를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를 정죄할 자가 왜 없겠는가?
우리를 정죄, 즉 심판의 자리로 끌고가는 존재가 셋이 있다. “마귀, 사람, 나 자신”이다.
그러나 모든 고발속에도 우리는 고발당하지 않고, 정죄당하지 않는다. 왜요? 착해서? 아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신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셨기 때문이다.
고전1:18/그러므로 십자가의 “의”가 성도의 능력이요 호심경이다.
성도가 십자가만 바라보고, 십자가를 자랑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가 죄 가운데 넘어졌을 때라도, 바울처럼 롬8:1-2 말씀을 당당하게 외칠수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자유케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귀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들추면서“너, 예수 믿는 사람 맞아?”하고 공격할 때,
“그래. 맞다. 어쩔래? 네 말대로 나는 지옥가야 마땅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내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받은 사람이다. 어쩔래? 마귀야. 너는 더 이상 나를 정죄할수 없어.”
이것이 바로 의의 호심경으로 무장한 것이다.
마귀의 정죄에도 넘어지지 않고 싸울 수 있는 영적강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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