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행 5:27-42
제목: 날마다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혜로 감옥에서 탈출한 사도 일행이 오늘은 다시 잡혀갑니다. 그리고 다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 앞에서 심문을 받습니다. 대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는 이들의 질문. 아니 폭언에 가까운 질타 속에 여전히 사도들이 하는 말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아멘!!
성도님들 이게 진리입니다. 당시 대제사장의 무리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 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습니다. 사람이 뭐가 무섭겠습니까? 그게 진짜 하나님의 뜻이라면 생명을 걸고 서라도 사도들을 잡아 죽여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여기 무리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로마 정부의 눈치를 봅니다. 진리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사도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원색적으로 전합니다. 지금 자기들의 생명을 결정할 수 있는 대제사장이 있는 제사장의 무리 앞에서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바로 너희가 종교지도자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개케 하시고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보내신 그리스도를 나무에 달아 죽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언만큼 제사장의 무리를 거북하게 하고 당황시킨 증언이 있을까요? 복음은 이렇게 원색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끔해 봅니다. 현대는 복음을 지나치게 포장하고 약화시켰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존 파이퍼라고 하는 신학자는 사람들이 싫어 한다고 복음에서 피를 빼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교회가 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복음은 세상이 주는 복을 쉽고 빠르게 받는 지름길 같은 방법이 아닙니다. 물론 전하는 대상에 따라 전하는 방법은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곧 복음의 내용을 변질시켜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복음은 사람을 거북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죄인이고 죄인인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간다라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를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하다고 하는 이말에 아무 거북함도 찔림도 없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 아닐까요?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33절 이들이 보인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의 복음을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가말리엘이 등장을 합니다. 가멜리엘은 율법교사요 모든 백성에 게 존경을 받는 자라고 성경은 말해 줍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 엘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생각하는 랍비의 이름이 ‘힐랄’이라고 합니다. 이 힐랄이라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국부와도 같은 존재로
랍비 지혜서인 탈무드의 5/2 정도 쓴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힐랄의 직계 제자가 바로 가말리엘입니다. 랍비 가말리엘이 죽었으니 모든 율법에 대한 존경이 무너졌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슬퍼했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자였습니다. 이 사람은 또한 사도바울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이 가말리엘이 하는 말이 정말 지혜롭습니다.
예전에도 드다와 갈릴리 유다가 백성을 꾀어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론적으로 그가 죽자 모두 흩어지지 않았느냐 그러니 우리가 상관하지 말자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합니다.
이 얼마나 지혜로운 말입니까? 비록 그가 주님을 영접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그는 사리에 맞게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알려진 대로 그의 말은 너무나 지혜로와 모든 사람들이 지금 흥분하고 성질내고 있는 이 상황에도 그의 말대로 할 것을 결정합니다. 그는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최소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열려진 마음으로 대응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나라와 우리 사회에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기가 중국이여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이 나라 정치인들 중에 이런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기독교 내버려 둬라 그게 가짜라면 무너질 것이요? 진짜라면 막는다고 되겠냐?
40절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아멘
사도들은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것을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름을 위하여 누구의 이름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사도들은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자로 여기심을 기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과의 부딪힘을 의미합니다.
어떤 때는 공회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주류의 삶을 사는 것에서 쫓겨나는 것 일수도 있습니다. “그 이름” 이것은 우리에게 남들과는 다른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히려 그로 인한 고난을 즐거워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자들에게 주신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성도님들 바로 우리는 그 이름을 위하여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마지막으로 42절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또한 ‘날마다’라는 표현을 보면 그들이 매일 수고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제한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한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또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라는 것을 보면 그들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만 국한된 신앙생활이 아니라 가정에서나 어디에서나 주의 이름으로 살아간 것입니다.
성도님들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살아갑니까? 성도님들은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힘을 쓰고 있습니까? 또한 성도님들 우리의 헌신은 교회에서만 입니까? 혹시 주일만 입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리고 사도들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걸 잊지 않는 우리들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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