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대상12:1-22
제목:하나님의 참된 용사
첫째, 인간관계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사람이 하나님의 참된 용사이다.
다윗이 시글락에 있을 때, 다윗에게 와서 다윗을 돕기 위해서 자진해서 그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활을 잘 쏠 뿐만 아니라, 양손으로 물매돌을 던질 줄 아는 용사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용사들이 바로 "베냐민 지파 사울의 동족"인 것이다. 베냐민지파는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왕의 출신지파이다. 2-7절에 이름이 언급되는 사람들이 바로 사울의 출신지파인 베냐민지파 사람들이고, 내일 본문 29절에도 보면 "베냐민 자손 곧 사울의 동족은 아직도 태반이나 사울의 집을 따르나 그 중에서 나온 자가 삼천 명이요"라고 했다. 즉 베냐민 지파의 대다수가 같은 지파 출신인 사울 왕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서도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 나아온 사람들이 많이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베냐민지파의 사람들이 동족인 사울왕이 아닌, 다윗에게로 것은, 그들이 인간관계의 친분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관계의 정을 먼저 생각했다면, 다윗을 돕기 위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베냐민지파 사람들이 다윗에게 나아온 때는 다윗이 잘 나갈 때가 아니다. 온 나라가 사울의 명령을 따라 다윗을 죽이려고 하던 때였고, 다윗이 왕이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족 베냐민지파인 사울의 편을 들지 않고, 다윗의 편을 들었다는 것은, 이들이 인정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관계의 친분을 앞세우면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없다. 인간관계의 친분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는 믿음의 용사가 되라.
둘째, 육신적 편안함보다 십자가를 선택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참된 용사이다.
갓지파 사람 중에서 광야에 있는 요새에 이르러 다윗에게로 돌아온 자가 있었다.(8절)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광야”라는 단어이다. 광야는 <거친 땅>을 의미한다. 광야라는 이 단어는 아주 의미심장한 단어이다. 왜냐하면 갓지파는 광야와는 전혀 상관없는 환경에 살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갓지파는 요단 동편쪽 길르앗 땅에 거주하는 지파였다. 요단동편 길르앗 땅은 땅이 아주 비옥해서 농사짓고 목축하는데 좋은 곳이었다.(민32장) 그런데 비옥한 땅을 버리고 다윗이 있던 광야, 아무 것도 없는 거친 땅으로 온 것이다.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광야 거친 땅에 살고 있는 다윗에게 왔다는 것은, 그들이 엄청난 희생을 했음을 의미한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들이 기름지고 비옥한 땅을 떠나 다윗이 있던 거친 땅 광야로 왔다는 것은, 한 마디로, 세상의 안락과 쾌락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여러분, 성도는 쉽고 편하고 넓은 길이 아닌, 좁고 힘들고 거친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라가는 길은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기 때문이다. 누가 하나님의 참된 용사인가? 세상의 쾌락과 편안이 아니라, 십자가의 삶을 선택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참된 용사이다. 육신적 편안함보다 주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라.
셋째, 성령의 감동을 따라 하나됨을 이루는 사람이 하나님의 참된 용사이다.
16-18절을 보시면, 베냐민지파와 유다지파의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찾아왔다. 그런데 다윗은 그들을 맞이할 때 “너희가 나를 배반하지 않고 진실된 마음으로 도우러 왔다면 나도 너희랑 연합할 마음이 있다”(17절)고 말했다. 그런데 18절에 삼십인의 우두머리인 아마새가 성령의 감동을 받았음을 말씀하고 있다. “성령이 아마새를 감싸셨다”는 말은 직역하면, “성령께서 아마새에게 옷입혔다”인데, 무슨 뜻이냐 하면, “성령께서 그를 옷입히듯이 완전히 주장하셨다”는 뜻이다. 아마새가 성령의 감동을 따라 말한 내용이 무엇인가? 요약하면 “우리는 당신께 충성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돕고 계시니 우리 사이에 평화가 있을 것이다.” 즉 지금 하나님은 아마새의 입을 통해 불안해하고 있는 다윗의 마음을 격려하고 위로하시는 것이다. 아마새의 말을 들은 다윗은 조금도 의심 없이 그 말을 믿고 아마새를 받아들여 군대지휘관으로 삼았다. 여러분, 사람이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진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면 처음 만난 사이에도 서로를 신뢰하게 되고, 능히 하나가 될 수 있게 된다. 교회는 성령의 매는 줄로 성도들이 하나 되어지는 곳이다. 사실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결코 하나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누가 하나님의 용사인가? 아마새처럼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용사이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살 때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지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하나됨을 이루는 믿음의 용사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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