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느2:11-20
제목:하나님의 일을 세우는 사람
첫째, 삶의 현장에서 실제화 되는 믿음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백성들을 모아놓고 <성벽재건의 비전>을 선포하지 않았다. 그전에 무엇을 먼저 했는가? 12-15절에 보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밤에 일어나서 먼저 성벽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부터 했다. 성벽을 재건하려면 얼마나 많은 재료가 필요한지, 성벽재건에 어떤 문제가 예상되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야 하는지, 이런 것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다. 왜 이렇게 하였는가? 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실제적인 준비를 하기 원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의 믿음은 <실제적 믿음>이었다. 그는 어떤 막연한 이상, 추상적 비전을 가지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자세로 임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키기를 원했다. 그래서 미리 철저히 조사하고 확인하는 일을 한 것이다. 믿음은 공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믿음은 실제여야 한다. 믿음은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현실화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잘 믿고 싶으신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믿음을 가지려고 힘써야 한다. 가정과 교회에 믿음의 성벽이 재건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가정과 교회에 무너진 곳이 어느 부분이고, 그것을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를 점검하고 확인해야 한다. 믿음은 공상과 추상에 머물면 안 된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믿음으로 주님의 나라를 세우는 성도가 되길 축원한다.
둘째, 살아 움직이는 전염성 있는 믿음
느혜미야는 총독으로 예루살렘에 왔다. 사실 그는 신하들에게 “총독으로서 명한다. 이제부터 성벽을 재건하라” 이렇게 한마디만 해도 되었다. 그러면 신하들이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명하신 성벽재건이라는 비전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를 원했다. 느헤미야는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17절)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했던 말들”(18절)을 전하였다. 그랬더니 백성들이 일어나 건축하자고 하면서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고 했다. 예루살렘성벽재건이 52일 만에 완성될 수 있었던 까닭은 모든 백성이 느헤미야의 비전에 공감하고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독불장군이 아니었다. 그는 혼자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함께”이다. 예수님은 능력이 있으신 분이기에 혼자 잘 하실 수 있는 분이었지만, 열두 제자를 불러 함께 하셨다. 성도의 믿음은 <혼자 잘하는 믿음>이 아니라, <함께 잘 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느헤미야의 믿음은 “전염시키는 믿음”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전을 나누어 한 마음을 품게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전염성 있는 믿음, 영향력 있는 믿음이 있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며, 우리의 믿음이 자녀들에게도 전염되고 공유되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브라보데이사역을 하는 이유는, 코로나 전염병 같은 악한 것을 전염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전염시키는 것이다. 나 혼자 잘 믿는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기에 퍼져나가고, 전염되는 생명력 있는 믿음 되기를 축원한다.
셋째, 반대에 굴하지 않는 단호한 믿음
느헤미야의 비전, 성벽재건의 사명을 이루는 일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었다. 반대가 있었다. 19절에 보시면, 산발랏, 도비야, 게셈이 느헤미야가 하는 일을 반대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반드시 반대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가 역사하기 때문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일을 중지시키고 좌절시키고 하나님 백성을 이간질 시키고 분열시키고, 실패감을 갖게 하려고 온갖 일을 벌인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반응을 보라.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20절) 그들의 공격적인 발언 앞에 주눅들거나 위축되지 않고, 단호하게 대처한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아무 상관이 없다. 신경 쓰지도 말고 참견하지 말라>는 것이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은 예루살렘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들이었는데, 느헤미야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그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것이 단호한 믿음이다. 여러분, 마귀의 역사를 대처하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단호하게 대적하는 것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느헤미야가 단호한 믿음을 가지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가?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실 것이다”(20절)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케 하실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기에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 힘으로 형통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형통케 하실 것이기 때문에, 마귀의 역사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 형통케 하실 하나님을 믿고 실제적이고, 전염적이고, 단호한 믿음을 가지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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