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삼하13:1-19
제목:사랑과 욕망
첫째, 인간의 욕망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다윗의 큰 아들 암논은 이복여동생 다말을 사랑하여 상사병에 걸린다. 구약의 율법은 이복남매간의 근친상간을 금지한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되어지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이미 마음을 빼앗겼는데, "그 사랑은 잘못된 사랑이니, 그런 사랑을 하지 말라"는 말이 통할까? 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인간의 욕망은 그 대상을 내가 정하지 않는다. 내가 대상을 정한 후에 욕망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저것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면, 이미 그것에 마음을 빼앗긴 상태인 것이다. 암논은 다말을 사랑했는데, 스스로의 힘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병이 생겼다. 이것을 <상사병>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상사병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상사병은 바로 <세상을 사랑하는 상사병>이다. 욕망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성도로 하여금 세상을 사랑하는 상사병에 걸리게 만든다.
둘째, 인간의 욕망은 사탄에게 이용당한다.
욕망으로 병이 생긴 암논에게 간교한 친구 요나답이 다가온다.(3절)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접근했던 뱀의 간교함(창3:1)은 바로 <하와의 욕망>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뱀은 하와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도록 부추겼다. 마찬가지로, 요나답의 간교함은 암논의 욕망을 채우는 것을 위해 활동한다. 암논은 요나답이 가르쳐 준 방법대로 하여 다말을 자기 침상으로 오게 하고, 결국 강제로 다말과 동침한다. 다말은 암논에게 그러지 말라고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복남매>의 근친상간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으로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금지하셨기 때문이다.(신27:22, 레18:9) 그러나 율법을 언급한 다말의 말은 암논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왜인가? 욕망에 빠진 암논은 지금 다말만 차지할 수 있다면 율법 어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고, 정확히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인간의 욕망은 말씀으로 다스려지지 않는다. 욕망에 빠진 암논에게 간교한 요나답이 찾아오는 것처럼, 우리 역시 욕망 따라 살면, 간교한 사탄마귀가 우리를 찾아오게 되어 있고, 결국은 끝이 좋지 않게 되어 있다. 우리가 욕망 따라 살게 되면, 사탄의 도구로 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셋째, 인간의 욕망은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15-16절을 보시면, 상사병이 날 정도로 다말을 사랑했던 암논이 다말과 동침한 이후에 오히려 다말을 미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인가? 애당초 암논은 다말을 통해 자기의 욕망을 채우고자 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즉, 암논은 다말을 차지하고 싶은 육신적 욕망, 즉 정욕에 끌린 것이지, 다말을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랑과 욕망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사랑의 끝은 <책임감>이다. 책임감이야말로 사랑의 완성이다. 사랑은 항상 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 설사 자신에게 불이익이 닥친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런데 욕망은 <철저한 이기심>에서 나온다. 그래서 이기심에서 비롯된 욕망의 끝은 필연적으로 <배신과 배반>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 다말을 사랑하는 듯 했으나, 다말을 저버리는 것이다. 여러분, 주님을 향한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한가? 내게 유익을 주시지 않으면 저버리는 마음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에게 불이익이 있더라도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넷째, 인간의 욕망은 주님조차도 이용한다.
18-19절에 다말은 자기의 채색옷을 찢었다. 아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수치와 비참함을 당했다는 뜻이다. 머리에 재를 쓰는 것 역시 자신의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현실을 애통하는 것이며, 머리에 손을 얹고 가는 것도 수치가 임함을 애통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해야 한다. 암논의 욕망으로 인해 다말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비참함과 수치>를 당한 것처럼, <예수님이 당하신 비참과 수치>는 인간의 욕망에 의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땅에 오셨건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버렸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수치와 비참함을 감수하셨다. 연약하고 날마다 쓰러지는 우리를 위해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무거운 죄짐을 대신 져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예수님을 찾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예수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을 원하는가? 아니면 나의 욕망을 위해 예수님을 찾는가? 주님이 주시는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은 주님만 바라본다. 그러나 자기욕망을 위해 주님을 찾는 사람은 암논이 다말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것처럼, 자기 힘을 동원한다. 예수님을 자기 힘으로 움직이려고 한다. 다말은 암논에게 “아버지 다윗에게 말하면 왕이 자신을 암논에게 주기를 거절하지 않을 것”(13절)이라고 하지만, 욕망에 사로잡힌 암논은 “왕의 처분에 맡기기보다는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여긴다. 이것이 바로 자기욕망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의 특징이다. 신앙은 기다림이다.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처분하시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 욕망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욕망을 이길 힘이 없다. 그러나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도와주신다. 하나님께 내 욕망도 맡기고, 내 삶도 맡기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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