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무엘상18:6-30
제목: 두려워 할 대상을 두려워할수 있는 지혜
다윗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싸움은 골리앗과 나 와의 싸움이 아닌, 이스라엘 군대의 실제적인 주인이신 하나님과 블레셋의 싸움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무모한 싸움 앞에 앞장서 나갔던 것이겠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눈치가 있는게 실력이라면 다윗은 정말 실력있는 사람인거죠? 우리에게도 이런 실력있길 소원합니다. 아멘! 이런 큰 전투를 마치고 백성 가운데 들어오자 많은 백성들은 환호합니다. 당연합니다. 춤 좋아하는 이스라엘 무려 40일간을 괴롭혔던 골리앗을 죽이고 숙적인 블레셋을 무찔렀으니 이스라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축제의 현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7절에서 발생합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이에 대한 사울의 반응이 8절입니다.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어제 본문에서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이 보였던 태도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입니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 본다고 요나단은 다윗을 보고 자기 생명같이 다윗을 사랑하여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약속이나 계약은 니가 잘하면 나도 잘 할게 뭐 이런 느낌이라만 언약이라는 단어는 무조건 일방적인 단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주로 언약을 맺습니다. 다윗을 사랑해서 다윗에게 막 퍼주고 싶어하는 요나단이 지금 이런 느낌일 것입니다. 요나단도 다윗과 똑같은 믿음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요 “사무엘상 14장 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아멘 다윗의 고백과 거의 비슷하죠? 그런데 왜?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사울이 쪼잔해서요. 사울이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요? 물론 그럴수도 있지만 성경은 이 이유를 정확히 밝힙니다. 우리가 성경을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무엘상 16:4절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악령을 조정시켜서 사울을 번뇌케 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악한 영에게서 보호하심을 거두셨다는 것은 지난 번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불량배들이 시비를 걸어도 태연하게 넘어갔던 사울. 그랬던 사울이 축제의 자리에서 여인들의 노래에 걸려 넘어 집니다, 사울이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영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 이것보다 비극적인 일이 있을까요? 성도님들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사울의 입장에서는 인간적으로 섭섭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섭섭한 생각을 할 수는 있어도 이걸 발전시키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1:15절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래서 청교도 격언에도 “새가 머리에 앉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새가 머리에 둥지를 틀도록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아시겠죠? 서운 할수도 있고 섭섭할 수 있지만 그걸 발전시켜 나가는 건 이건 완전히 사탄의 밥이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섭섭 마귀 서운 마귀에게 속지 마시고 지지 마시고 승리하시길 소원합니다.
그럼에도 9절입니다.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이는 긍정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눈여겨 봤다는 말입니다. 너 조심해!! 두고 볼꺼야! 이런 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10절 이튿날 오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여기서 힘 있게 내리매 라는 뜻’은 요셉이 감옥에서 ‘형통했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악한 영이 우리 안에서 형통했다는 말입니다. 신앙이란 누구의 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가 하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충만하든지 악령에 충만하든지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다윗과 악령에 충만한 사울이 충돌합니다. 그래서 사울이 손에 있는 창을 던져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합니다. 완전히 미친거죠?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울은 두려워해야할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다윗을 시기하고 두려워 했습니다. 그래서 망한 것입니다. 이에 반해 14절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아멘
성도님들 이걸 알아야 이 세상. 하나님의 관점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누굴 두려워 하고 누굴 부러워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부러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살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29절에서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대앗의 대적이 되니라” 이에 반해 오늘 말씀의 마지막인 30절은 다윗이 일을 지혜롭게 함으로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더라 이렇게 다윗의 일을 소개합니다. 성도님들 오늘 본문의 다윗처럼 우리도 두려워할 대상을 두려워 할 수 있는 그리고 사랑받아야 할 대상에게 사랑받는 지혜로운 성도님들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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