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삼상17:50-18:5
제목:믿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
첫째, 믿는 자에게 승리하는 은혜를 주신다.
50-54절까지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성경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은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승리하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서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골리앗이 나타날 때마다 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다(17:11, 17:24) 그런데 다윗이 등장해서 골리앗과 싸우자, 이스라엘을 공포에 몰아넣은 골리앗은 너무 어이가 없이 쉽게 무너져 내린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골리앗”이라는 존재는 “믿음 없이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의미한다. 우리가 다윗과 동일한 은혜의 삶을 살려면 다윗에게 있었던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그게 무엇인가? <다윗에게는 골리앗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골리앗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과 우리의 차이점이다. 다윗에게 있는 것이 우리에게 없고, 다윗이 바라보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지 못하고, 다윗이 믿고 의지하는 것을 우리가 의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다윗과 같은 승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윗이 경험한 승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눈이 달라져야> 한다. 어제 본문 36절에 보면 다윗은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이리이까”고 말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는 골리앗을 외형으로 보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그가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이라는 시각으로 봤기 때문이다. 할례란 하나님 백성의 표시로서, 신약식으로 표현하면 세례이다. 즉 소속이 다름을 의미한다. 할례받은 백성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사랑하고 보호하시는 백성이지만, 반대로 할례받지 못한 사람이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로서, 하나님의 심판 대상에 불과한 존재이다. 그러니 다윗은 골리앗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골리앗을 바라보는 다윗의 시각이었다. 다윗이 바라보는 기준은 저 사람이 얼마나 대단하고 놀랍냐가 아니라, 저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냐 아니냐였다. 즉 다윗의 기준은 <하나님>이었다. 이스라엘은 골리앗만 보느라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이것이 믿음이다. 성도는 항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매 순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걸 보지 못하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성도가 하나님만 바라볼 때 하나님은 그에게 승리하는 은혜를 주신다.
둘째, 믿는 자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주신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18:1) 당시 요나단은 다윗을 처음 만난 것이다. 그렇다면 요나단은 처음 만난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다는 뜻인데,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가? 물론 처음 만난 사람이 마음에 들 때 호감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호감이 생겨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에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것은 인간의 감정과 상식을 뛰어넘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즉 18장에 나오는 요나단의 사랑은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랑>을 말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 사랑>을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한다. 3절에 보시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언약을 맺었다고 나온다. 너무 사랑하다보니 언약을 맺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는 분이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성도된 우리 관계는 <언약관계>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이 언약은 법이 아닌 사랑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법적 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이다. 법적인 관계는 쉽게 말해서 “내가 무엇을 안했는데, 혹시 내게 벌을 내리지 않을까?” 이런 것을 염려하는 관계이다. 십일조를 하고, 새벽기도를 하고, 주일성수를 잘하면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법적인 관계에 매여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법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여야 한다. 법적인 관계에는 자유함이 없다.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마음에 자유가 없다. 그러나 사랑의 관계는 무엇을 하고 안하고에 매이지 않는다. 사랑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 왜 주일 안 지켰어? 너 왜 십일조 안했어? 너 왜 성경 안 읽었어?”라고 따지지 않으신다. 만약 우리가 거기에 매인다면 우리와 주님의 관계는 법적인 관계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너 나 사랑하니?”이다. 요나단은 다윗을 생명처럼 사랑하여 언약을 맺었다. 요나단의 이런 사랑의 언약은 변함이 없었다. 사실 요나단은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다윗의 등장은 사울왕가의 몰락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러나 요나단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 사랑이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 번씩이나 사울왕의 손에서 다윗을 구원해준다. 우리는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말라. 우리의 어떤 모습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만을 붙드는 성도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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