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갈 4:1-11
제목: 드디어, 때가 차매
오늘은 성탄본문이라면서 왜 갈라디아서 본문이 나왔을까? 궁금하시죠? 구약의 맨 마지막 성경은 말라기이고 신약의 맨 처음 성경은 마태복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구약과 신약의 시간적인 간격이 무려 400년이라는 겁니다. 이 간격을 신구약 중간기라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은 그 어떤 선지자도 보내지 않으시고 그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신 침묵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고 번제를 드리고 십일조를 바치고 절기를 지켰어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두 번의 포로 그리고 귀환, 마카비 왕조의 반역과 헬라 로마의 지배를 받는 오랬동안 이스라엘이 큰 압제를 받았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음했어도 하나님은 묵묵 부답으로 침묵하셨습니다. 구약의 맨 마지막 장인 말라기 4장 5절과 6절은 이렇게 끝이나는데요 5절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케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히시니라. 이렇게 끝이납니다. 말라기에서 말하는 그 날이 이르기전 보내신다는 선지자가 엘리야 세례요한이구요. 그 날이 바로 초림. 즉 성탄절이자 우리가 기다리는 대림절, 이 땅에 오신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의 오심을 말하는 종말의 때입니다. 왜 그날이 두렵고 무서운 날입니까? 이스라엘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지만 이날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요 최악의 날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을 두려워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때가 찼습니다. 4절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때가 찼습니다. 헤롯의 선심성 공약으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성전이 만들어지고 지금도 수 많은 제사들이 절기들이 지켜졌지만 하나님의 침묵은 계속되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찾고 찾아도 응답없으신 하나님이 드디어 때가 돼서 이제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지금 전 세계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고 헬라문화권이라 헬라어가 전 세계 공용어이고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위한 도로가 깔려있어 어디든 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고 유대 내부에서는 로마의 압제와 제사장과 바리세인들과 결탁한 세리들의 압제로 인해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겠다는 내부적인 어려움으로 “어서 그 성경에 약속했던 메시야‘가 우리에게 왔으면 하는 그 메시야 대망 사상이 최고조에 다랐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때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바울은 성탄절의 의미를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잘 알고 있는 유업을 이을 자를 예로 들어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설명하는데요 1절과 2절입니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로마시대에서는 유산을 상속받을 적법한 상속자라 하더라도, 그 상속자가 어리면,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보호자나 관리인의 보호를 받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당시의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토대로 바울은 복음과 율법이 갈라디아 교인들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초등학문 다른 번역본에는 ‘유치한 교훈’이라고 표현한 이 교훈은 율법을 말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의해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율법에 얽매여 종으로서 삶을 살았다고 말씀합니다. 즉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보호자와 관리인’으로 비유되는 ‘율법’아래 놓여 있었던 사람들에게 율법은 임시적인 보호자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 아래 매여 있는 자들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셔서 이제 우리는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때가 차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제는 새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율법 아래에 놓이게 하셨습니다. 그 날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초림. 즉 첫 번째 크리스마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여자에게서 나게 하셔서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율법아래에 있는 자들을 자유케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신이지만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율법 아래에 놓이시고 죽으심으로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아들의 자격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녀의 자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죄인 된 인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인 갈라디아 교인들이게 ‘그 아들의 영’ 곧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아멘!! 이 모든 것이 인간의 계획이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주셔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완전하시고 분명한 계획이심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꾸짖습니다. 9절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처음에 그 날에 두렵고 무서운 날이라고 했죠?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이 날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성탄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때가 차서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가장 완벽한 방법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우리들이 더 이상 종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10절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율법에서 말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며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하나님의 완전하고 완벽한 의를 충족시키시고 하나님을 만족케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도 사람들은 은혜의 복음을 거부합니다. 어떻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은혜가 있을 수 있냐고 어떻게 값없는 복음이 존재하냐고.. 그래서 성탄절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선물주는 날 눈 산타와 같은 헛되고 헛된 것만을 기념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을 마칩니다.
11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성도님들 성탄절은 우리 주님 이 땅에 오심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우리를 위해 죽이신 주님이면 충분하고 그 오심을 기리고 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 크게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충분하십니까? 코로나로 우리의 인생 앞날을 알수 없는. 코로나 뿐이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언제 우리가 아플지 죽을찌 모르는 불확실의 연속입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그 인생 가운데 주님이면 충분하십니까? 주님이면 충분한 성탄절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