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무엘상 14:43-52
제목: 잘된다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오늘 본문인 14장에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광기에 휩싸인 사람이 등장을 하는데요.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는 지금 전쟁을 지휘하는 중입니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바로 보급입니다. 저는 군대를 짧게 갔다 왔지만. 제가 생각해 봐도 아무리 뛰어난 지휘관과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면 그 어떤 군대라도 패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사울 왕은 생과 사를 오가는 전쟁터에서 극한의 체력을 소모하는 병사들에게 안정적으로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책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어리석은 영웅 심리에 빠져 일반 상식과 전혀 다른 무모한 결정을 내립니다. 블레셋으로부터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 그 어떤 음식도 먹지 말라는 금식령을 내립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 ‘저주’를 선언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율법을 선포했음을 의미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사울이 회개하고 참회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그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군대가 수풀을 지날 때 달콤하게 흐르는 꿀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먹지 못한 채 갈등과 굶주림 속에서 괴로워해야만 했습니다.
한 편, 사울의 그 어리석은 명령을 듣지 못했던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있지 않고 자신의 부하와 함께 단 둘이서 블레셋 군인 스무명을 무찌르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이 일어난 사울 왕의 명령을 알지 못한 채 꿀을 먹고 정신을 차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결국 요나단은 이로 말미암아 전혀 의도치 않게 왕명을 어긴 불경건한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 사울은 블레셋을 추격하여 싸워야할지 말지, 처음으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성경은 그게 처음 사울이 왕이 되어 쌓은 제단이라고 고발하듯이 말합니다. 그 때, 기대했던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자 그는 그 원인이 이스라엘 군대 지휘관 중에 누군가 분명히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울은 그 누군가를 향한 엄중한 저주를 퍼부으며 군사들을 모아놓고 제비를 뽑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범인은 그의 장남 요나단으로 밝혀졌습니다. 요나단도 자신이 전투를 마치고 눈앞에 흐르는 꿀을 무심결에 먹었음을 솔직하게 고백 하였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제비뽑기를 통하여 자신의 장남이 공개적으로 죄인으로 지목받았음에도 사울이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44절에 보면 사울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을 합니다. 44절입니다.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와 같은 독기어린 말을 하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십니까? 설령 자신의 자녀가 맞아 죽을죄를 지었어도 그것을 감싸주는 게 부모로서 마땅한 사랑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나를 죽여라 이래야 하는게 아닐까요? 그런데 사울은 그러지는 못할망정 아무런 죄 없는 아들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까지 저주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러한 요나단의 결백을 오히려 이스라엘 군대가 적극적으로 변호합니다. 왕의 말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은 엄연한 반역행위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용기 있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5절 말씀 제가 읽겠습니다.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그러니까 사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죄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철저히 함께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지만 탐욕에 눈먼 사울만은 그를 천하의 극악한 죄인으로 몰아 붙였습니다. 13장 번제사건 14장 요나단 사건들을 통하여 분명히 알게 되는 사울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사울은 권력을 지키고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위해 충성하는 힘없는 백성들은 물론이고 하나 밖에 없는 맏아들과 심지어는 하나님마저도 이용 대상이자 걸림돌로 여기는 사람이었음이 밝혀집니다. 이러한 사울의 생애를 본문 52절에서 이렇게 간단히 요약합니다.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성경은 사울을 가리켜 그가 일생 동안 강력한 군대를 만드는 일에 온 힘을 다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기록입니다. 오히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훌륭한 왕이라고 할수 있는 일 아닐까요?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이스라엘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매우 심각한 범죄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신명기 17장 16절은 이렇게 왕의 임무를 설명합니다.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요약하자면 최신 무기를 통해 군사력 증강에 몰두 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이 말씀은 얼핏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왕으로서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키우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율법을 이스라엘 왕들을 향해 남기셨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분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원리는 결코 힘과 폭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이 말씀에 더해 신명기 17장 18, 19절에 이스라엘 왕은 반드시 율법책을 직접 옮겨 적어, 곁에 두고 읽으면서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고 또한 모든 계명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 율법책, 즉 모세오경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결코 그들의 의지와 노력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국가 공동체와 그들의 왕이 다른 나라들과 그들의 권력자들로부터 철저히 구별되는 가장 커다란 차이점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출애굽을 비롯한 모든 구원과 승리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구별된 백성들과 왕은 온 세상이 탐욕에 취해 갈구하는 온갖 성공과 풍요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꺼이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울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업신여겼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정의와 공평에 따라 약자들을 돕기 위해서가 아닌 오직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서 권력을 유지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 결국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추악한 독재자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신기하고 놀라운 것이 47절에 보면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라고 합니다. 성도님들 그래서 잘되는게 하나님의 뜻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님에도 잘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이 있고 역경이 있는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 주변에 많잖아요? 그러나 그게 복일까요? 어렵다고 저주일까요? 이걸 분별하는 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길 소원합니다.
성도님들 어찌보면 사울은 역사상 그 누구 못지않게 화려한 성취를 이룬 사람입니다. 평범한 청년이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두 손에 움켜쥐며 살았습니다. 그가 광기에 사로잡혀 불신앙을 드러냈음에도 오늘 본문은 역설적으로 그가 가는 곳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권력을 유지할 든든한 가족을 이루었다고 사울 가문의 족보를 소개합니다. 그러나 점차 높은 곳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는 어느새 하나님을 자신에게서 불필요한 존재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왕이시여 왕 만세 왕에 대한 칭찬을 하자 이미 사울은 자기를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뜻을 잊고 자기만이 진정 이스라엘의 왕이라 생각합니다. 왕처럼 행동합니다.
성도님들 지금 우리는 대림절 넷째주를 향하고 있습니다. 12월이 있다는 것은 이제 일년의 끝이 있다는 것이며 대림절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다시 오심을 기억하는 시간들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시간이 흘러 이 세상과 이별할 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시간들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기 원하십니까? 더 나아가 심판대 앞에서 이 땅에서 살아온 우리들의 나날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했다고 인정받기 원하십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들과 삶의 자리들 그리고 손에 쥔 모든 것들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리하여 끊임없이 다른 이들을 짓밟아 올라서고 힘을 모으는 데만 애를 쓴 다면 그것은 마치, 지난 날 사울이 걸었던 바로 그 어리석은 길을 똑같이 따라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전쟁에는 능한 지파였던 베냐민 그리고 사울왕 그러나 그는 전쟁에는 능한 사람이었을 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에는 능한 사람이 아니여서 결국 사는 날 동안 전쟁하길 힘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소원합니다. 이 땅을 살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을 전쟁에 능한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는 풍요를 누리는 사울 같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조롱합니다. 그 조롱을 듣는 우리 자신조차 세상과는 다른 십자가의 길을 따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너무도 비참하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있죠? 그러신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상의 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평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어려움에도 쉽게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고 주님의 참된 위로와 승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과 언제나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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