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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사랑의교회

2022-8-22 큐티말씀 - 예수를 바라보라(히12:1-13) - 김도완목사

사무간사22022.08.22 20:07조회 수 163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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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히 12:1-13

제목: 예수를 바라보라       

 

 지난 주 금요일 서보문장로님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믿음이란 ‘신뢰가 넘쳐서 흐를 수밖에 없는’ 그러나 믿음은 보이지 않기에 그 믿음을 보이지 않는 삶속에서 증명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본문인 11장은 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소개합니다. 그래서 믿음장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부터 모세 사사들과 사무엘 선지자 그리고 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순교당하고 핍박받은 많은 사람들을 성경에서 믿음을 삶으로 증명한 사람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도 오해하시면 안되는게 있는데요. 그들이 믿음 장에 있기는 하지만 지금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는 영웅과 위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설득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잘해서 그들이 완벽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준과 자격에 이른게 아니라 믿음의 삶이란 즉 하나님이 그 사람을 향한 오래 참으심과 끊임없는 설득작업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들을 믿음의 위인 믿음의 영웅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들을 증인 이라고 표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이렇게 시작을 하는데요. 여기서 ‘이러므로’ 가 아주 중요한데요. 이제 두장이 남은 히브리서의 마지막에 대한 결론을 준비합니다. 그 결론이 ‘이러므로’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을 칭찬하고 끝을 맺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 1장부터 11장까지 예수님을 강조해 온 그 진정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모세보다 천사보다 안식일보다 율법보다 제사보다 제사장보다 더 크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겁니다. 

 이 자리가 바로 어디입니까? 경기장입니다. 갑자기 뜬금없으시죠?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헬라문화의 로마의 식민지인 이스라엘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1절을 살펴보면 좀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에게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증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법정에서 증거를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봤다.” “내가 들었다”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증인이라는 단어는 ‘순교자’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내가 본 것을 증언하면 순교를 당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냥 못봤다고 하면 되는데. 내가 봤다. 그것 때문에 순교하던 시대가 바로 히브리서가 쓰여졌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봤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들과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부활하심 그리고 승천하심을 그리고 다시 오겠다고 하신 것을 봤습니다. 그걸 그래서 말했을 뿐인데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고통과 죽임이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은 그 다음 세상을 믿지 않기에 지금 이 땅에 온통 관심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잘 살고 잘 먹기를 원하는 것이 이 땅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나타나 이 땅이 아닌 다른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을 위해 살라고 했으니 그래서 그들을 가르켜 이 땅을 ‘혼란케 하는 자’라고 칭하고 그들을 박해하고 그들을 때리고 그들을 죽이기 까지 했다는 겁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다시 경기장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경주, 달리기를 하는 체육관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냅니다. 그 큰 스타디움에 많은 증인들이 있는 이들은 바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을 지킨 수많은 사람들입니다. 이 증인들이 관객석에서 우리들을 부러운 모습으로 바라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렇게 대단해 보이는 믿음의 선배들도 이제는 주인공인 우리들. 더 자세히 말하면 신약의 성도들을 부러워 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그렇게 열심히 살았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예수님의 모형을 수건을 쓴것처럼 어렴풋이 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성도들은 성육신 하신 그 예수님을 직접 그리고 이제는 말씀으로 만나고 있으니 참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처지가 더 나은거겠죠? 암튼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와서 그 당시 체육대회였던 올림픽은 지금도 인기가 많지만 특별한 오락거리가 없던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이벤트였습니다. 지금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있는 곳이 바로 헬라어로 김나지움 이게 체육관이란 뜻의 어원입니다. 그 뜻을 살펴보면 체육관이란 뜻은 벌거벗은 이란 뜻입니다. 헬라문화를 사랑했던 알렉산더리아 대왕 때부터 시작된 이 문화는 남자들만 입장할 수 있는 축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수들은 정정당당하게 싸운다는 의미로 옷을 다 벗고 달리기를 하고 레슬링을 하고 검투를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흉측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이 문화였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에 정통한 그러나 헬라에 살고 있는 히브리서 독자들을 향해. 세 가지 권면을 합니다. 경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고’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벗어 버리는 것이 경기를 시작하는 방법이였던 것처럼 믿음이라는 신앙이라는 경주에 앞서 율법의 완성이시고 제사의 핵심이시고 우리에게 있는 튼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의 모든 죄를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당당하게 경주에 임하라는 뜻입니다. 

 또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저는 달리기를 잘 못하지만 그렇게 보이잖아요? 달리기 하는 선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특별히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에는 단숨에 즉 한번도 숨을 쉬지 않고 100미터를 달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호흡마저도 방해가 되기에 숨을 참고 인내함으로 경기를 임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인내한다는 말은 단순히 참는 다는 말을 넘어서 골로새서 2장 7절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뿌리를 박아/닷을 내려서 라고 하는 말로도 사용할수 있는 말입니다. 왜 경기를 하는지 잘 생각하고 그 진리안에 뜻을 두어서 흔들리지 말고 경기에 임하라는 권면일 것입니다. 

 또 마지막으로 2절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합니다. 모든 경기자 마찬가지겠지만 달리는 사람은 속도도 중요하지만 방향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방향이 잘못되서 트랙을 벗어나면 실격이겠죠? 그래서 경주에 임한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의 주인 예수. 믿음의 근거가 되고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헬라어 원어로는 못을 박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하고 경주에 임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성도님들 우리의 믿음생활은 단거리가 아닙니다. 10초 아님 1분 뛰고 끝나는 경기가 아니라 아주 긴 마라톤을 평생하는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세상 경기처럼 1등과 2등을 가리는 경기도 아닙니다. 완주하면 되는 그런 경기입니다. 그런데 이게 쉬워 보이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되고 성공을 하고 우리의 기도제목이 응답을 받아 행복한 삶을 살것이라고 기대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향한 믿음입니까? 바로 우리 주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있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높이며 자기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곳입니다. 아무리 포장을 해도 결국은 자기 욕심을 위해 살아가는 곳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법대로 경주하는 것을 포기하고 뒤 돌아 주저 앉아 자신의 사명을 잊고 편하게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고통을 이겨나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그 길을 가는 교회가 필요하고 그래서 함께 하는 믿음이 필요하고 그래서 말씀이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또 이 길은 칭찬받고 평안한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6절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교회와서 잘했다. 아이고 봉사도 하네. 이렇게 칭찬만 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우리의 잘못을 징계받고 채직질로 훈계하신다는 것입니다. 8절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오히려 징계가 없으면 친 아이들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징계와 연단을 받아야 이 경주가 이 경기가 제대로 될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에 우리의 시선을 바라보라 고정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우리 구주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우리 함께 하심으로 우리는 이 경기에서 승리할 것이고 우리는 결국 최후 승리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라옵기는 우리 모두 예수님 때문에 모든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함으로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함으로 이 믿음의 길 이겨나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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