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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사랑의교회

2022-7-27 큐티말씀 - 오직 너는(디도서 2:1-10) - 김도완목사

사무간사22022.08.08 14:52조회 수 167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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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디도서 2:1-10

제목: 오직 너는 

 

 그레데섬의 목회자였던 디도 목사님에게 쓴 목회서신이 디도서라고 했습니다. 그레데섬의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뼈속부터 장사꾼들이었던 그들의 성향이 순전히 거짓말쟁이며 사기꾼이며 배만 위하던 그 사람들을 위해, 게다가 헬라파 유대인들이라 여전히 예수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특히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을 위해 목회하고 있는 디도 목사님에게 사도 바울은 그들을 엄히 꾸짖어서라도 그들을 바른 믿음으로 인도하고 권면했습니다. 이것이 어제까지의 본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절 말씀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며 ‘오직 너는’ 이라는 단어가 참 많은 것을 의미하는 단어인데요. 이 단어는 ‘그러나 너는’ 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넓은 길 넓은 문으로 간다고 할찌라도 너는 그렇게 하지 말고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해 보자면 그레데의 이단들은 온갖 부패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그러나 디도만큼은’ 그들과 다르게 행동하길 바란다는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우리의 상황과도 적합한 지적입니까? 

그러나 너는 세상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찌라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찌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더라도 그러나 너는 심천사랑의교회 성도들은 그렇지 말라는 강력한 권면인 것입니다. 그래서 디도만큼은 다르게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해라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디도 목사님에게 주신 권면입니다. 바른 교훈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거죠? 지난 주 최민환목사님이 하신 말씀처럼 “담대히” 하나님을 말씀을 전할수 있도록 성도들이 기도해 달라고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게 있는데요 어떤 목사님의 말씀이 좋아서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목사님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이 있기에 그 말씀을 바르게 전하면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설교자가 좋은 설교자 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설교자가 좋은 설교자라는 뜻입니다. 바라옵기는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과 교역자들이 좋은 설교자들이 될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1절에서 사도바울은 아들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 젊은 목사 디도에게 하나님의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에 대하여  함구하거나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바 영혼을 관리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자로서 더욱 담대하게 선포하고 적극적으로 외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2절부터는 디도가 목회해야 할 대상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오늘 본문에서 다섯 종류의 대상들을 설명합니다. 2절 늙은 남자 3절 늙은 여자 4절 젊은 여자 6절 젊은 남자 9절 종들까지 다섯 부류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먼저 2절 늙은 남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늙은 남자가 갖추어야 할 많은 덕목을 소개 했지만 요약해 보자면 절제와 신중함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절제한다는 것은 나이답게 늙어 가는 것입니다. 무림용어로 하면 내공이라고 하죠? 늙은 남자의 멋스러움이란 그냥 하루 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겠죠? 하루 하루 삶이 쌓여서 만들어진 삶에서 배어나오는 멋일 겁니다. 이걸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또 3절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여자들은 언어의 달인들이시죠. 정말로 말 몇마디로 한 사람 간단히 죽이는거 아주 쉬운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늙은 여자들에게는 말로 사람을 모함하지 않고 그 탁월한 언어의 능력들을 가지고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것이란 사도 바울이 인생 말년에 디모데후서 4:7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말은 법대로 경주했다는 뜻인데 이 근거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일생을 다 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녀들에게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후배들인 젊은 여자들에게 선한 것을 즉 말씀을 가르치라고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그 당시 문화적인 배경지식이 필요합니다. 초기 기독교의 성도들은 대부분 여자들이거나 종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남녀 주인과 종이 결코 기능적으로만 다를 뿐 인간적으로는 평등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듣고 너무나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 그대로 그들에게는 이 사실이 복음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자들이 가정으로 돌아가서 믿지 않는 남편에게 왜 나한테 이러냐고 우리는 다 평등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냐고 남편들을 쏘아 붙이는데 어떤 남편들이 좋아했을까요? 여러분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지금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2000년 전을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 세월이 조금 더 지나면 교회는 여자들이 아닌 남자들이 가득할 수도 있습니다. 집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던 남자들이 교회에서 참 자유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무튼 이런 일이 2000년 가정에서 그리고 종과 주인의 관계에서 일어났기에 그 당시로 치면 굉장한 사회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여러 서신서에서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고 종들아 상전에게 복종하기를 우리 주님에게 하듯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가 남녀 차별을 인정하고 인간 간의 차별을 지지하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남편에게 복종하고 종들이 상전에게 그리고 상전이 종에게 잘 해줘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내일 본문이지만 14절인데요.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로 복음 때문입니다. 전도의 문이 막히지 않도록 복음이 오해받지 않도록 바로 복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4절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5절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즉 모든 것은 복음전도를 위하여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인내하고 참으라는 것입니다.  또 9절에서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현재 자신들이 섬기고 있는 주인 밑에 들어가 ‘범사에’ 복종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더 나아가 순종할 뿐만 아니라 상전들을 기쁘게 할 것을 권면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까지 해야 합니까? 8절 후반절을 통해 바울은 디도가 왜 이런 사람들을 이렇게 가르치기 앞서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적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기 위함이며 동시에 복음 사역자들이 악하다는 비방을 듣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은 적대자들이 처음에는 당당한 태도로 복음 사역자들에게 부끄러움을 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후에는 반대로 부끄러움을 받게 되는 자로 변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8절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겠습니다. 우리의 행실은 과연 어떨까요? 우리의 대적자들이 우리를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낄까요? 아님 가소롭다고 할까요?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모든 내용을 정리해 보면, 바른 교훈을 따라가는 삶은 결코 가볍거나 쉬운일이 아님을 본문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늘 그렇듯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은 세상의 방향을 거스르며, 세상에서 그 어떤 사람들보다 수고하며, 고생하는 일이 많기에 때로는 불편하며, 성가신 일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디도를 통해 기독교 공동체에게 종들로부터 늙은 남자까지 그 행실에 대한 지침을 본문을 통해 말해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시대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교훈이기에, 적당히 재해석해서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내 상황에 억지로 오늘의 본문들을 가지고 역으로 남을 가르치는 도구로 말씀을 이용할 수 있는 위험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이 디도에게 부탁했듯, 말씀은 내 자신을 향하여 적용하며, 그 본을 먼저 내 자신이 보여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대적자들과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를 통해 바라보며 알아간다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겠습니다. 손해보는 것 같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 보호하시는 그 은혜를 느끼며, 감사하는 하루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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