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왕하23:21-30
제목:올바른 신앙생활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올바른 신앙생활이 가능하다.
본문 23장에는 22장과 구별되는 특이한 점이 있는데, <성전에서 발견한 책>을 22장에서는 율법책이라고 했는데, 23장에서는 언약책이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성전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23:2),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23:21) 왜 율법책을 언약책이라고 바꾸어 부르는가? 율법책과 언약책은 같은 책이지만, 의미는 다르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악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롬3:19)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을 진노와 저주에 가두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유월절이라는 언약>이 담겨 있다.(21절) 유월절의 언약이 무엇인가? <어린 양의 피로 진노와 심판에서 건짐을 받는다.>는 언약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유월절 언약에 담겨있다.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사람의 의지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작은 습관 하나조차도 쉽게 바꾸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언제나 쉽게 죄의 유혹에 넘어진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우리를 덮으면 우리 속에 진정한 개혁이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이 언약의 은혜는 <말씀>안에서만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요시야 왕 이전에는 하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다(22절)는 것이다. 만약 요시야 왕이 율법책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상은 제거했을지언정 유월절은 여전히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신앙의 참된 회복은 우상을 제거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사는 것이어야 한다. 유다백성들은 오랜 세월동안 우상을 섬겼으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몰랐다. 요시야가 말씀을 발견하고 나서 개혁을 하기 전까지 유다백성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악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요시야가 말씀을 발견함으로 인해 그것이 죄가 됨을 깨닫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임을 깨닫게 되고, 그 진노에서 벗어나고자 유월절 언약의 말씀을 붙들게 된 것이다.
둘째, 공로를 주장하지 말고, 오직 은혜를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신앙생활할 때 무엇을 기대하는가? 우리가 열심히 섬기면 하나님께서 내 일을 잘되게 하시고, 형통케 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기대를 박살낸다. 요시야왕이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유다를 버리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회복은 없었다.(26절) 왜인가? 요시야왕의 신앙이 유다를 향한 진노를 거둘수 있는 의(義)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가 우리의 열심과 공로 때문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이유가 우리의 열심과 공로 때문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과 공로 때문에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열심과 공로 때문에 멈추지 않는다. 인간의 공로와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될 수 없다. 여러분, 인간의 의에 소망을 두지 말라. 인간의 의, 즉 자기 공로, 자기 열심에 소망을 두지 말라. 여러분, 요시야의 결국을 보라. 요시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8살에 왕이 되어, 31년간 통치했으니, 39살에 죽은 것이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신앙좋은 요시야를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게 하셨을까? 29절에 보면, 요시야는 애굽과 앗수르의 전쟁에 끼어들었다가 죽임당했다. 왜 요시야는 애굽을 막아섰을까? 대35:21에 보면,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요시야에게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요시야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애굽을 막아서다가 죽임을 당했다. 요시야의 이런 행위는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분명 요시야는 어느 순간에는 말씀 붙들고 열심을 내었지만,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행위와 공로를 주장할 수 없다. 하루에도 여러 번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하고, 믿음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우리가 바라고 기대할 것은 행위와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거기까지이다. 거기까지가 한계이다. 우리의 행위와 공로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거나, 또는 반대로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거나 할 수 없다. 은혜를 주셔야 주어진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성도는 은혜 없이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은혜 안에 살고, 은혜만 붙드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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