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룻기2:14-23
제목: 보이지 않는 손
룻기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망한 이방인 여자 룻이 시어머니의 고향에서 펼쳐지는 인생역전 이야기” 이렇게 소개한다고 했습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라 네이버 사전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시어머니에게 잘해라 그럼 복받는다. 또는 며느리 잘 만나야 가정이 산다. 이렇게들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니라고 했죠? 이 룻기는 한 가정의 이야기가 아닌 한 민족 더 나아가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아주 중요한 책입니다. 그래서 맥추절. 오순절 우리네 추수감사주일과 같은 추수의 기쁨을 감사하는 절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여 이 책을 낭독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한다고 했습니다. 아 또 하나. 혹시 서울에 휘경동이라고 하는 곳을 아시나요? 경희대학교가 있는 곳인데요. 거기에 룻교회가 있습니다. 지나가다가 하도 궁금해서 들어가봤는데요. 거기에 룻의 구속사적 의미를 쫘악.. 암튼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 룻기는 다윗 왕정을 앞두고 다윗을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여주고 있는 한 민족을 넘어 우리의 구원을 다루고 있는 구원의 여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세밀하게 역사하시는 보이지 않는 손을 만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소원합니다.
1장 6절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그래서 토요일 본문에서 가라 안 가겠다. 가라 못 간다. 어머님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다. 이렇게 해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이야기로 1장이 마무리됩니다. 1장은 온갖 절망과 낙담입니다. 죽음입니다. 장례식뿐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삶이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그 삶은 아픔입니다. 멸망입니다. 그런데 2장에서는 갑자기 보아스가 등장을 합니다. 엘리멜렉의 먼 친척 그리고 기업무를 자인 유력한 부호인 사람. 그리고 그때가 보리 추수때였음을 성경은 말해 줌으로써 이제 은혜가 시작되겠구나. 이런 기대와 희망을 갖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1장은 절망이었는데 2장에서는 희망을 노래합니다. 어떻게 희망이 시작된다구요? 희망은 은혜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 14절이 이렇게 시작되는데요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또 이것 뿐만 아니라 추수하는 소년들. 일꾼들에게 저 여자에게 함부러 대하지 말고 일부러 저 여자 주위에 곡식 다발을 놓아두어 넉넉히 줍도록 배려 합니다. 배려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저 여자를 보호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 왜 보아스가 이렇게 까지 룻을 선대합니까? 저도 궁금하지만 여러분도 궁금하겠지만 룻도 궁굼해서 물어봤습니다. 어제 본문인 11절에서 보아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그러니까 이미 나오미와 룻은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이미 알려진 유명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 보아스가 또 이렇게 대답합니다. 12절인데요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아멘. 이게 보아스가 룻을 선대한 이유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룻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이유입니다. 창세기 6장 8절애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어제 중고등부 설교 본문이었는데요. 아무리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다 쓸어버리시겠다 라고 다짐하는 그 시기와 시대 속에서도 “은혜를 입는 사람들은 있더라는 겁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속에서도 이삭은 100배나 되는 결실을 거두웠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은혜로 말입니다. 성도님들 그리고 우리도 그 은혜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값없이 거져 주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호의 그 은혜 때문에 우리는 그 은혜로 구원을 입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이 잘한게 있습니까? 아니 우리는 잘 한게 있던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룻에게 나오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왜 이걸 은혜라고 하냐면요 어제 본문인 3절에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룻은 망한 이방여자로써 베들레헴에 와서 남편도 없는 사람이 되어. 시어머니를 공양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폐지수집이나 하고 빈병을 줍고 있는 처지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3절 하반절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세상 사람들은 이 상황을 보면 뭐라고 합니까? 아 운이 좋았네. 아 재수가 좋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다구요? 은혜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지금 개입하셨네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4절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마침!! 사람의 말로는 우연이라고 밖에 할수 없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역사한다고 밖에는 말할수 없는 것입니다. 보아스. 그가 누구입니까? 유력한자 라고 설명하고 각주에는 부호라고 부자라고 말하기고 하고 때로는 전쟁영웅이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롯에게는 지금 구원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 기업 무르는 자의 모티브는 메시야 구원자의 뉘앙스입니다. 절망적인 삶에서 희망을 주는 마치 10년간이나 하나님을 떠나 있어 흉년을 맞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켰을 때 하나님이 10년만에 보리를 추수할수 있는 은혜를 주셨던 것처럼. 룻에게 있어 보아스는 그런 구원자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가 어떻게 우연히 와서 마침 룻을 선대합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연히 마침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없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요 이것이 우리를 은혜없는 사람과 은혜 있는 사람을 갈라놓는 유일한 방편인 것입니다.
성도님들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세상에서는 우연이라고 하고 마침 잘됐네! 운이 좋았네 하고 반대의 사건을 보면 운이 없었네. 재수가 없었네. 하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누가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우리를 덮고 감싸시고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기에 우리는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 세상의 관점이 아닌 믿음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시길 소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보입니까? 은혜 받은 사람과 은혜 받지 못한 사람들의 확실한 차이가 보입니다. 바라옵기는 심천사랑의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임을 알고 지금도 은혜없으면 안되는 사람인줄 알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은혜의 사람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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