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민16:36-50
제목:은혜를 입으려면
첫째, 자기 죄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반역한 사람들을 죽게 하신 하나님은 반역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향로를 쳐서 편철을 만들어 제단을 싸라고 명령하셨다. 편철이란, 함석같이 납작하게 편 철판을 의미한다. 반역자들의 향로를 가지고 편철을 만들어 제단에 씌우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범죄하여 심판받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제단을 싸고 있는 편철로 변한 향로를 보게 될 것이다. 그 편철을 볼 때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스스로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제단을 감싼 편철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38절)가 되었고,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물(40절)이 되었다. 구약시대에 제단을 감싼 편철이 이스라엘의 표요, 기념물이었다면, 오늘날 신약시대에 성도의 표와 기념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다. 따라서 십자가는 성도로 하여금 자기 죄를 깨닫게 하는 표요, 기념물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만든 자기 죄를 생각하며 부끄러워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께 시선을 두어야 한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고라의 일당이 죽은 것에 대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41절)이다. 모세가 고라일당을 죽였는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모세에게 따지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고라일당이 심판당하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왜인가? 시선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고, 사람에게 향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주권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다스림>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은 삶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것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원인을 둔다. 뭔가 마음 상하는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하지 않고, 그 사람 때문에 이렇게 되었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의 시선은 하나님을 향했다. “회막을 바라본즉”(42절) 히브리원문에 보면, “그때에 그들이 회막으로 눈을 돌렸다.”고 되어 있다. 모세와 아론은 사람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로 향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하나님이 막아주셨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뜻이다. 믿음은 <시선>이다. 믿음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바라보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 엎드려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백성을 멸하겠다(45절)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이라면 그 순간에 어떤 반응을 하시겠는가? “할렐루야. 아멘.” 하시지 않겠는가?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45절)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는 말은 기도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백성을 위해서 다시 중보자로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누군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 우리의 반응은 무엇인가? 그를 저주하는가? 아니면 그를 위해 기도하는가? 그것이 우리의 영적 상태, 영적인 성숙도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다. 신앙이 어릴 때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 한 마디 해줄 수 없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하면, 즉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자신과 이웃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마음 상해도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 왜 그래야 하는가? 기도하지 않으면 죄가 우리를 다스리기 때문이다. 기도하면 죄를 이기게 된다. 모세가 기도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공동체가 더 나아지고 더 좋아졌겠는가? 아니다. 더 큰 슬픔과 고통과 상처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이 기도함으로 문제가 더 커지지 않게 되었다. 즉 <기도로 문제를 덮은 것>이다. 기도는 <문제를 문제 아니게 만드는 능력>이다. 여러분, 문제없는 교회 없고, 문제없는 성도 없고, 문제없는 목사도 없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특별히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강퍅한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자비를 더하실 것이다.
넷째,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모세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원망하는 이스라엘에게 전염병을 내리셨다. 왜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을 내리셨는가?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대적하는 자는 멸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심판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지켜보지 않았다. 제사장 아론은 모세의 명령을 받아 향로를 들고 전염병이 돌고 있는 이스라엘백성들 사이로 달려갔다. 거기가 어디라고 뛰어 들어가는가? 그러다가 전염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는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흠이 없고 거룩하신 분인데, 낮고 천한 자리로 내려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개의치 않고 생명의 중보자가 되어주셨다. 제사장 아론이 중보자가 되어 향로를 가지고 백성을 위해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자 사이에 섰을 때 염병이 그쳤다. 여기서 “죽은 자와 산자 사이”라는 말은 학자들에 의하면, “죽어야 할 자와 용서받아 생존할 자 사이에 섰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민16장 초반에 고라일당의 분향은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지만, 제사장 아론의 분향은 많은 생명을 살리며 심판을 막아섰다. 모세와 아론은 분명 자기를 원망하며 돌로 치려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즉시 회중에게서 떠나라고도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서는 중보자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거나, 형편과 처지가 어려우면 모든 직분과 봉사를 내려놓으려고 한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우리에게 <힘들고 어렵다고 사명을 포기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준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