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민14:36-45
제목:사는 자와 죽는 자
오늘 본문에는 <사는 자와 죽는 자>가 나온다. 성도는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 살고 어떤 사람이 죽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첫째, 하나님이 죽이시는 사람은 인간의 상식으로 신앙생활하려는 사람이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죽이시는 사람은 자기 상식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10명의 정탐꾼들은 인간의 상식으로 하나님을 믿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1-33) 이들의 논리는 <우리는 그들보다 약하기 때문에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믿음이 아닌, 상식으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했다. 믿음이 아닌, 상식을 앞세운 열명의 정탐꾼의 결국이 무엇인가? 가나안에 들어지 못하고 재앙으로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상식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믿음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을 정성스럽게 하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받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도 인간의 상식에 근거하는 것이다. 사람이 제 아무리 열심을 보여도, 그 열심이 인간의 상식에서 나온 열심이라면 하나님은 인정하시지 않는다. 본문에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행동이 바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상식에 근거한 행동이다.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가나안땅으로 쳐들어간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인가?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되겠지. 그러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그들은 “너희는 결단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싹 무시하고 자기들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다. 결과가 무엇인가? 그들은 참패를 당한다. 왜인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나안땅을 정복하겠다고 쳐들어갔는데, 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은 것인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느냐 안하느냐가 아니라, 그 땅에 들어갈만한 사람이 되었느냐>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오해가 무엇인가? 가나안 땅을 차지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상식을 가지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들의 결국은 실패이고 죽음이었다. 하나님이 살리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상식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 눈에 보이는 환경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사람이다.
둘째, 하나님이 죽이시는 사람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 사람이다.
“나를 원망하고, 나를 거역하는 악한 회중에게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광야에서 다 죽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가 선포하자, 이스라엘 백성이 크게 슬퍼했다.(39절) 다음날 그들은 “우리가 범죄하였다”고 말했다. 그들이 보이는 행동은 마치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크게 슬퍼하고, 범죄했다고 말한 후에 어떤 행동을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겠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이제라도 가나안땅으로 올라가겠다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그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들은 이제 와서 순종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회개하는 척을 하지만, 실상은 “광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또 거역하는 것이다. 그것은 참 회개가 아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내리신 벌도 달게 받아야한다. 그런데 그들은 입으로는 회개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가나안을 가리켜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이라고 자기 멋대로 부르면서 쳐들어갔고, 그 결과는 대참패였다. 이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그저 입으로만 회개할 뿐, 그 마음으로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보이는 대신에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는 불순종”의 죄만 가중시키고 있었다. 참된 회개는 말씀을 거역하던 자리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로 가는 것이다. 아무리 회개한다고 백번, 천번을 말해도, 말씀을 거역하는 자는 형통할래야 형통할 수 없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친 메시지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였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말씀에 복종하는 삶>이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입으로는 회개한다고 하면서도, 그 회개하는 방법을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분들이 있다. “아, 그동안 내가 너무 오래 교회에 나가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교회에 못가겠습니다.” 그게 회개하는 자세인가? 예배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얼른 빨리 예배자리에 나오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아니겠는가? 어떤 분은 자기가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는 죄에 대해 회개한다. 자기가 직분을 받아놓고도 제대로 충성하지 못했다면서 뭐라고 하는가? 그 직분을 내려놓겠다고 한다. 얼마나 모순된 말인가? 자기의 불충을 하나님 앞에 회개한다면 다시 열심을 내고, 다시 갑절로 충성하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아니겠는가? 이미 불순종해 놓고서도, 다시 한번 똑같은 불순종을 반복하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참 회개가 아니다. 하나님이 살리시는 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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