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9:17-35
제목: 잊지 말아야 할 것
첫째, 인간은 본질상 죄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17-20절은 욥 자신이 부당한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자신은 죄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고난을 주셨다는 것이다. 20절에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는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하나님 앞에 죄인 아닌 자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무죄함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기는 무죄한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자기를 죄인처럼 징계하신다는 탄식을 하는 것이다. 29절을 보면, 주님이 우리를 정죄하시면, 어떤 노력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자기는 무죄한데 하나님에 의해서 죄인 취급을 당한다는 주장이다. 욥은 자기가 의롭지 않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은 고난을 당할 죄를 범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의롭다”는 말은 옳다는 뜻이다. 그래서 욥이 자기를 의롭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께 왜 그렇게 하시냐?”고 반문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욥의 말대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 30-31절 말씀처럼, 우리가 스스로 깨끗하게 해보려고 해도 주님 보시기에는 더럽다. 인간 스스로는 아무리 의로워지려고 해도 의로울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한 존재이며, 재앙을 당하는 것이 당연한 존재이다. 그런데 욥은 자신이 의롭지 못하다고 말은 계속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고난과 재앙을 주신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역시 욥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도 욥처럼 인간이 죄인이며, 지옥가야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예배시간에는 인정한다. 그런데 문제는 삶의 현장에서는 이만하면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빠진다. 이만큼 기도하고, 이만큼 봉사하고, 이만큼 성경을 알고 있으니, 나름 괜찮은 성도라고 착각하며, 하나님이 자기에게 복을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은혜받은 죄인이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서 하라고 하는 모든 것을 다 이행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죄인에 불과하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죄인이다. 그러므로 죄인됨을 잊지 말고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성도가 되라.
둘째, 우리에게 중보자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욥은 34절에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주의 막대기는 시23편에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를 안위하는 도구이다. <안위>란 국어사전에 “몸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위로하다”는 뜻이다. 본래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도구이다. 그런데 욥에게는 주의 지팡이가 몸의 편안과 마음의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치고 두렵게 하는 도구인 것이다. 즉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켜주시지 않고, 자기를 위로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 속에서 욥은 33절에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중재할 중보자가 없다는 것이다. 33절에 나오는 "판결자"는 히브리어로 "모키흐"인데, 단순히 누가 옳은가를 결정하는 재판관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키흐>는 <화해를 통하여 다툼을 종결짓는 중재자>이며, <공동의 친구로서 그 손을 양쪽에 놓음으로써 두 당사자를 한데 연합시키는 협상자>를 뜻한다. 욥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중보하고 중재해줄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계신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육체를 찢으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막힌 담과 휘장을 찢으시고, 길을 여셨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연약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중재하고 계신다. 우리가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놓일 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모키흐"(중재자)가 있다면 얼마나 든든하겠는가? 예수님이 바로 여러분의 중보자 되심을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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