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눅23:33-38
제목:용서하시는 그리스도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34절)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과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은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달리신 것>이었다.
<용서>가 무엇인가? 본문에 사용된 “사하다”라는 말은 <법률용어>로서, “빚진 사람을 빚진 상태로부터 풀어주어서 형벌을 면해준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성경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 채무를 완전히 없는 것으로 탕감시켜 주는 것. 이것이 <용서>의 의미이다. 성경적인 용서는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즉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이 있는데, 그것을 마치 없는 것처럼 내숭을 떨라는 뜻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용서는“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에게 <벌주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죄지은 사람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는 것>, 그것이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용서이다.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고 보복을 포기하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용서이다.
주님께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다는 것은, 이미 주님안에서 용서가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용서에는 도덕적 용서와 신앙적 용서가 있다. 도덕적 용서는 상대방이 나에게 용서를 빌기에 내가 용서하는 것이다. 반면, 신앙적 용서는 <상대가 나에게 용서를 빌지 않아도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다. 회개는 커녕 상대방이 아직도, 여전히, 계속해서 나를 향해 잘못을 범하고 있음에도 용서하는 것이 신앙적 용서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용서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은 세상사람들도 다 할수 있는 도덕적 용서가 아니다. 성도는 신앙적 용서를 하는 자리까지 가야 한다.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만 달란트 같이 많은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다는 점이다. 저와 여러분은 그 사랑과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이 내게 범한 일백 데나리온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 왜인가?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도 용서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께 일만 달란트의 죄를 용서받았다면, 우리가 용서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러분이 용서받은 자임을 확신하는가? 그렇다면 용서하는 사람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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