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요12:12-19
제목:왕으로 오신 예수
유대인들이 열렬하게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왕이 되어주셔서 모든 고난과 어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왕으로 우리에게 오셨는가?
첫째, 예수님은 겸손의 왕으로 오셨다.
15절에 인용된 스가랴 9:9의 예언이 강조하는 것은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가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는 것이다. 왜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는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것인가? 스가랴는 “그는 겸손한 왕이기 때문에 나귀 새끼를 타셨다”고 증언한다. 겸손이란, 자신의 높음, 자기의 힘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예수님은 헤롯왕만 아니라, 로마의 황제와도 비교할수 없는 만왕의 왕이기 때문에 왕이 타는 백마, 군마를 타고 오셔도 되시는 분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은 전능자요, 창조주이심에도 불구하고, 왜 힘없는 자의 모습으로, 초라한 모습으로 다가오셨는가? 그것은 바로 “나는 너희들이 바라는 그런 왕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유대인들이 기다린 메시야 왕은 자기들을 모든 고난과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힘있는 왕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셨다.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에 힘없고 볼품없는 어린나귀를 타시더니 붙잡히실 때에도 힘 한 번 쓰지 않으시고 붙잡히셨다. 그리고 그렇게 힘없는 모습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신기하게도, 예수님을 향해서 무엇을 구하는가? 예수님이 나를 도와서 남들보다 더 잘 살게 해주고, 남들보다 더 강해지게 해주길 기대하지 않는가? 그러나 주님은 힘있는 왕이 아닌 겸손의 왕으로 오셨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힘으로 사는 나라>가 아니라, <은혜로 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힘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사람이다. 성도는 힘으로 자기를 증명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안되고, 예수님처럼 겸손의 모습으로, 섬기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둘째, 예수님은 구원의 왕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백마를 타고 칼든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죄는 칼로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죄는 힘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죄는 반드시 죄값을 치루어야만 해결이 가능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힘으로 죄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으로 죄값을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 지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이다. 예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의 왕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세상의 힘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세상의 힘을 주기 위해 오신 구원의 왕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늘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구원의 왕이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세상의 힘을 주는 구원자>를 기대한다. “내게 돈만 있다면 행복할텐데. 내게 건강만 있다면 평안할텐데.” 그래서 그런 세상의 힘을 주실 수 있는 구원의 왕을 기대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가난과 질병을 해결해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왕이라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건강이 없어서가 아니라, 죄 때문이다. 직장이 아무리 좋아도, 돈을 아무리 많이 벌었다해도, 자식을 잘 키웠다해도, 죄와 사망에 매여있는 인생에게 참 소망은 있을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참된 소망이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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