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5:1-15
제목: “은혜 없는 베데스다”
성도님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전 요즘 이 요한복음을 통해 은혜 많이 받고 있습니다.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 담임목사님처럼 깊은 묵상으로 이 기쁨과 감격을 다 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함께 나누고 싶은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 요한복음에 가득 가득 하기만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직접 보여주신 진정한 은혜에 대해 새롭게 깨닮게 되는 은혜가 있길 소원합니다.
첫째. 은혜 없는 베데스다가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보다 북쪽에 위치한 “양의 문”이라는 제사에 드려질 양들을 씻는 장소로 가셨습니다. 그곳에 베데스다 못이 있었습니다. 한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가더라도 ‘베데스다’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교회, 병원, 기도원, 시설 등을 볼 수 있는데요 그 이름이 가진 의미가 좋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는 “베짜타”, 또는 “베드자다”로 음역 되기도 합니다. 단어 앞에 나오는 “베드” 또는 “베쯔”는 벧엘, 또는 베들레헴에서 보여지듯이 ‘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스다, 짜타는 은혜, 자비, 인자함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 또는 “자비와 인자가 넘치는 집”으로 번역이 가능한 아주 예쁘고 기분 좋은 듣기만 해도, 정말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곳, 따라서 그곳에는 기적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3절을 보시면 많은 병자들, 눈 먼 사람들,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 혈기 마른 사람들이 모여있습니다. 분명, 이 곳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기적인 병 고침의 역사가 있어 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베데스다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 후반부에서 4절 입니다.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라.” 먼저, 성경은 이 부분을 대괄호로 묶어 놓았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의 주석과 설명이 있었지만 이 본문을 성경 그대로 이해하자면 연못에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할 때, 가장 먼저 물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치유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라는 단어의 뜻은 (first)입니다. 말하자면, 누구든지 가장 먼저 첫번째 일등으로 들어가야만 낫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럼 이 베데스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한번 상상을 해 봅시다. 조선 말기 때도 같은 일들이 발생했는데 과거 시험이 변질되었습니다. 돈을 주고 좋은 장소를 잡아주는 직업인 선접꾼 과거 문제에 답을 알려주는 직업 거벽, 그리고 글씨를 기가 막히게 잘 써서 답안을 정리해 주는 직업인 사수라고 하는 전문꾼들이 한팀이 되어 대리 시험을 봐줬으니 누가 과거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겠습니까? 공부는 못해도 돈이 있는 사람이 당연히 합격했겠죠? 오늘 베데스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장 “먼저” 연못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좋은 장소를 택하여야 합니다. 역세권에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듯이, 가장 좋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분명 그곳에도 돈 힘 권력 등이 총동원 될 것입니다. 또 좋은 자리를 택하고 난 다음에는 언제 물이 동할지 모르니까, 24시간 365일 그것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또한 물이 동할 때,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밀쳐내고 고객을 연못으로 옮겨야 하는 특수 요원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필요한 곳이 베데스다 였습니다. 제 아무리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믿는다 할지라도, 돈없고 힘없는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가 없는 곳이 바로 이 베데스다 시스템입니다. 이런 돈과 힘이 권력이 지배하는 장소가 어떻게 “베데스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단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완전 자본주의적 발상입니다. 이게 무슨 베데스다입니까? 이게 무슨 은혜의 집입니까? 은혜는 커녕, 고약한 자본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경제논리, 힘의 논리, 경쟁의 원리,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 하는 약육강식이 따로 없는 곳, 제일주의, 승리주의 원리가 작용하는 아주 치열한 싸움터였습니다.
이렇듯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이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베데스다를 은혜의 집이라 착각하고 모여든다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현대판 베데스다인 한국교회가 오버랩되어 보이시죠? 제가 말하지 않아도 성도님들이 이미 다 알고 계실 겁니다. 매일 뉴스가 대신 비판을 해 주니 저는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찾으신 곳이 다름 아닌 이 베데스다였습니다. 말하자면, 일등이 되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진짜 은혜가 없는 은혜의 집 무한경쟁체제 속으로 예수님이 친히 찾아가신 것입니다. 이 자체에 이미 예수님의 메시지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원하시는 은혜란 이런 힘의 논리 돈이 지배하는 그런 것이 아니야! 라고 주장하시고 계신 겁니다. 성도님들 하나님의 은혜가 어찌하여 일등이 아니면 얻지 못하는 세상의 경쟁과 똑같은 은혜가 되어 버렸습니까?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것을 비꼬아 꼬집고 있습니다. 은혜가 경쟁이 되다. 예수님은 경쟁이 되어 버린 힘의 논리에 지배당한 가짜 은혜를 은혜가 은혜되는 진짜 은혜로 되돌려 놓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원리가 아닌, 베데스다의 원리, 은혜의 원리를 회복시켜주시고자 그 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 없이는 회복의 은혜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회복 사역은 8절 “일어나라!”의 명령으로 시작됩니다.
일어나는 것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하셨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2장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시면서, 예수께서 “성전을 일으킨다”의 의미를 예수님의 육체가 부활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성전을 일으키고, 예수님의 부활하신다고 말씀하신 단어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일어나라”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진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어떤 사람을 찾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았던 사람은 의외로 “꼴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힘 좋고 돈 많은 지위가 높은 사람,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 경호원들이 쫘악 붙어 있어 다른 사람들을 다 쫓아낼 만한 힘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38년 동안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루저, 패배자를 찾았습니다. 그는 분명 꼴등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뒤돌아 갓 하시는 일등이 꼴등되고 꼴등이 일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꼴등에게 다가오심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38년 동안 은혜의 장소에서 꼴등으로 살아 온 인생, 은혜의 장소에서 은혜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인생이 새롭게 일어나는 그래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성도님들 아무리 은혜의 장소라 할지라도, 제 아무리 베데스다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으시면 부활의 기적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9절은 오늘 이 일이 안식일에 일어났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원래 안식일에는 이런 일을 해야 하는거야 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 안식일에 대해서는 내일 담임목사님을 통해 들으시길 바랍니다. 성도님들 우리 같은 꼴등 인생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저와 같은 취급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성도님들이 아무리 일등의 삶을 살고 있더라도. 힘이 좋아서 미리 좋은 자리를 선점해 놓고.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놓고 언제든지 은혜 받을 만한 준비를 하셨다 하더라도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곳이 어디라도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 베데스다이고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절대 베데스다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셨기에 우리는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말씀을 통해 진짜 예수님이 계시는 베데스다 안에 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세상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는 은혜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함께 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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