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1:15-28
제목: 성도의 정체성
세례요한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19절에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세례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라고 물을 때에 요한의 반응은 아주 분명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역시 이 질문 앞에 서야 한다. “네가 누구냐” 성도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 안에 거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었다.(14절) 또한 17절 말씀에도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받았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님에게서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성도는 날마다 예수님의 은혜안에 사는 사람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우리는 잠시라도 은혜가 없으면 넘어지고 자빠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우리의 죄 문제와 연약함을 해결해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허물과 죄를 사함받고 새로운 피조물로 새 출발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예수님은 진리 그 자체, 말씀 그 자체이신 분이다. 주님은 지금도 설교를 통해, 성경을 통해, 구역모임이나 성경공부, 큐티를 통해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귀를 기울이면 반드시 주님께서 진리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듣기는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믿는다고 말하면서 말씀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불신앙이요, 죄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은혜를 구하지 않고, 말씀에 반응하지도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다시 영적 어둠에 빠지게 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안에 거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 자기 소명을 알고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유대인들이 사람을 보내어 세례요한에게 네가 누구냐라고 묻는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두번째로 질문하기를 “그러면 네가 엘리야냐?” 그런데 세례요한은 “나는 아니라”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세례요한을 엘리야라고 말씀하셨다.(마11:14) 그런데 세례요한은 왜 아니라고 했을까? 사람들은 세번째로 “그 선지자냐?”고 묻는다. 신18장에 보면 하나님이 언젠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질문에 대해서도 요한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눅16:16에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다. 그런데 왜 아니라고 했을까? 세례요한은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하고, 선지자도 아니라고 부인했다. 왜 그랬을까? 그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로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존재목적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요한은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가 그리스도앞에서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만 생각했다. 그래서 22절에 사람들이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고 질문하자, 뭐라고 대답하는가? 23절“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대답한다. 자신은 소리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이다. 자신은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충분히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니다. 나는 아니다. 아니다”라고 일관되게 말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려 했다. 내가 부인되어야 예수가 드러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죽어지고 내 안에 예수가 사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신앙의 매력은 “내가 죽어지는 것”이다. 내가 죽어질 때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산다. 날마다 죽어짐으로 주님을 드러내는 성도가 되라.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