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9:7-21
제목: 지금보다 더 좋은 믿음을 가지려면?
기드온에게는 아들만 70명이 있었습니다. 이 숫자는 첩의 자식은 포함되지 않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이 첩의 자식중에 ‘아비멜렉’이란 아들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왕이 되지 않겠다고 했지만 자기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 ‘우리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이름이 짓고 그렇게 살게 합니다. 그 기드온이 죽고 나자 이 아비멜렉이 세겜의 외가 친척들을 찾아가 “기드온의 아들 70명이 다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좋으냐 아니면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좋으냐?”라고 묻고는,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는 강력한 유혹의 말을 던집니다. ‘아비멜렉’이 왕이 되기만 한다면 자신들은 순식간에 왕족이 되는 것입니다. 받을 권세와 이득이 머리에 그려지는 것입니다. 외가 친척들인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었습니다. 불법 정치 자금을 제공한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이 돈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기드온의 아들들 70명을 한 날에 모두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고 단 한 사람 막내아들 요담만이 몸을 숨겨 살아남게됩니다. 이후 세겜 사람들은 6절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선언합니다.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도 오르지 않았던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광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패역의 자리였습니다. 악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뿐이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 모든 원인이 한 때 믿음의 영웅이었던 기드온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드온이 황금 에봇을 만들고 그것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을 방치한데서 이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도님들 빛나는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성공 뒤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성공보다는 그 뒤의 삶의 자리가 우리보다는 우리들의 자녀들이 더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는 믿음의 대물림이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첫째,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 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가까스로 살아남은 요담이 우화를 통하여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어느 날 어느 숲속에서 나무들이 자신들의 왕을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그들은 감람나무를 찾아가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9절에서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이 요청을 받은 감람나무는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하면서 사양했습니다. 그러자 나무들은 두 번째로 무화과나무를 찾아가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11절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이 요청을 받은 무화과나무는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하면서 사양했습니다. 나무들은 세 번째로 포도나무를 찾아가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13절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포도나무 역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하면서 사양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찾아간 것이 가시나무였습니다. 그러자 15절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가시나무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도 못하면서, 아니 가시를 통해 온갖 고통을 주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고 합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라며 참으로 어의없는 말을 합니다. 아니 가시나무에 무슨 그늘이 있습니까? 그리로 피하면 가시에 찔릴 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백향목을 태우겠다고 합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크고 고상한 나무입니다. 사실 가시나무와는 비교대상도 아닙니다. 격이 다릅니다. 진짜 왕이 되어야 할 나무입니다. 그럼에도 가시나무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교만해져 가장 고상한 나무마저 불살라 버리겠다고 위협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앞의 세 나무, 곧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사명과 자신의 존재이유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한 것이 나무들 위에 군림하고 우쭐대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가시나무는 어떻습니까? 일말의 소명감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가시나무라고 해서 전혀 무익한 나무는 아닙니다. 비록 큰 재목으로 쓰임 받지는 못하고 귀한 열매를 맺지는 못하지만 마지막 자신의 몸을 불살라 어둠을 밝힐 수는 있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모세가 양치기로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 임재 하셨던 장면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나무가 자신을 살라 마지막 소명을 다할 때 하나님은 그 가운데 임재 하셨습니다. 가시나무라고 해서 저주받은 쓸모 없는 나무는 아닙니다. 나무들이 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했을 때, “안 돼 내 사명은 마지막에 불에 타서 어둠을 밝히고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 주는 거야”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가시나무는 오히려 열등감과 적개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삼지 않으면 ‘불이 가시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살라버리겠다’고 협박을 한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자신보다 잘난 것들에 대한 열등감과 적개심으로 가득합니다. 가시나무의 열등감은 끝없이 높아지려는 욕심으로 표출되었고, 결국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도 함께 망하게 하는 불행을 가져오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도님들 우리의 소명이 무엇입니까? 요즘 세례와 입교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우리의 기억을 더듬어 봅시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 본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우리에게 주신 사명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이 귀한 사명 잘 감당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소원합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갑시다.
요담이 이 우화를 통해 말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무에 대해 말하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을 책망하기 위해 우화를 빌려 말한 것입니다. 즉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은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책망의 내용은 16-18절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요담이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을 책망하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16절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어떤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면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요 요담은 그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 모두가 훗날 하나님께 들을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진실한지’, ‘의로운지’ 항상 물어야 합니다. 비록 내게 손해가 되더라도 말입니다. 잠시는 내게 손해가 되는 것 같아도 결국은 내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잠시 받는 고통이나 손해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약속합니다. ‘진실하고 의로운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는 사실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사람들의 평가나 눈앞의 이익에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진리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억하며 ‘진실하고 의로운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3년 후 요담의 저주처럼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최후를 맞이합니다. 성도님들 ! 부메랑을 아시지요. 던지면 다시 돌아오는 놀이 기구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부메랑과 같습니다.
진실함을 던지면 구원과 축복으로 돌아옵니다. 불의함을 던지면 저주와 파멸로 돌아옵니다. 오늘 요담의 우화를 통하여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소명을 깨닫고 그 소명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 뜻을 이루는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신 형편과 사정은 다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은사를 받았느냐가 아니라 그 받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깨닫고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이 진정으로 성공한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축복하시는 삶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이와같은 삶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목: 지금보다 더 좋은 믿음을 가지려면?
기드온에게는 아들만 70명이 있었습니다. 이 숫자는 첩의 자식은 포함되지 않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이 첩의 자식중에 ‘아비멜렉’이란 아들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왕이 되지 않겠다고 했지만 자기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 ‘우리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이름이 짓고 그렇게 살게 합니다. 그 기드온이 죽고 나자 이 아비멜렉이 세겜의 외가 친척들을 찾아가 “기드온의 아들 70명이 다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좋으냐 아니면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좋으냐?”라고 묻고는,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는 강력한 유혹의 말을 던집니다. ‘아비멜렉’이 왕이 되기만 한다면 자신들은 순식간에 왕족이 되는 것입니다. 받을 권세와 이득이 머리에 그려지는 것입니다. 외가 친척들인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었습니다. 불법 정치 자금을 제공한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이 돈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기드온의 아들들 70명을 한 날에 모두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고 단 한 사람 막내아들 요담만이 몸을 숨겨 살아남게됩니다. 이후 세겜 사람들은 6절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선언합니다.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도 오르지 않았던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광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패역의 자리였습니다. 악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뿐이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 모든 원인이 한 때 믿음의 영웅이었던 기드온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드온이 황금 에봇을 만들고 그것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을 방치한데서 이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도님들 빛나는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성공 뒤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성공보다는 그 뒤의 삶의 자리가 우리보다는 우리들의 자녀들이 더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는 믿음의 대물림이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첫째,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 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가까스로 살아남은 요담이 우화를 통하여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어느 날 어느 숲속에서 나무들이 자신들의 왕을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그들은 감람나무를 찾아가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9절에서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이 요청을 받은 감람나무는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하면서 사양했습니다. 그러자 나무들은 두 번째로 무화과나무를 찾아가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11절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이 요청을 받은 무화과나무는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하면서 사양했습니다. 나무들은 세 번째로 포도나무를 찾아가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13절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포도나무 역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하면서 사양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찾아간 것이 가시나무였습니다. 그러자 15절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가시나무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도 못하면서, 아니 가시를 통해 온갖 고통을 주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고 합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라며 참으로 어의없는 말을 합니다. 아니 가시나무에 무슨 그늘이 있습니까? 그리로 피하면 가시에 찔릴 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백향목을 태우겠다고 합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크고 고상한 나무입니다. 사실 가시나무와는 비교대상도 아닙니다. 격이 다릅니다. 진짜 왕이 되어야 할 나무입니다. 그럼에도 가시나무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교만해져 가장 고상한 나무마저 불살라 버리겠다고 위협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앞의 세 나무, 곧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사명과 자신의 존재이유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한 것이 나무들 위에 군림하고 우쭐대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가시나무는 어떻습니까? 일말의 소명감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가시나무라고 해서 전혀 무익한 나무는 아닙니다. 비록 큰 재목으로 쓰임 받지는 못하고 귀한 열매를 맺지는 못하지만 마지막 자신의 몸을 불살라 어둠을 밝힐 수는 있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모세가 양치기로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 임재 하셨던 장면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나무가 자신을 살라 마지막 소명을 다할 때 하나님은 그 가운데 임재 하셨습니다. 가시나무라고 해서 저주받은 쓸모 없는 나무는 아닙니다. 나무들이 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했을 때, “안 돼 내 사명은 마지막에 불에 타서 어둠을 밝히고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 주는 거야”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가시나무는 오히려 열등감과 적개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삼지 않으면 ‘불이 가시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살라버리겠다’고 협박을 한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자신보다 잘난 것들에 대한 열등감과 적개심으로 가득합니다. 가시나무의 열등감은 끝없이 높아지려는 욕심으로 표출되었고, 결국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도 함께 망하게 하는 불행을 가져오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도님들 우리의 소명이 무엇입니까? 요즘 세례와 입교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우리의 기억을 더듬어 봅시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 본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우리에게 주신 사명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이 귀한 사명 잘 감당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소원합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갑시다.
요담이 이 우화를 통해 말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무에 대해 말하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을 책망하기 위해 우화를 빌려 말한 것입니다. 즉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은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책망의 내용은 16-18절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요담이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을 책망하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16절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어떤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면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요 요담은 그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 모두가 훗날 하나님께 들을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진실한지’, ‘의로운지’ 항상 물어야 합니다. 비록 내게 손해가 되더라도 말입니다. 잠시는 내게 손해가 되는 것 같아도 결국은 내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잠시 받는 고통이나 손해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약속합니다. ‘진실하고 의로운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는 사실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사람들의 평가나 눈앞의 이익에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진리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억하며 ‘진실하고 의로운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3년 후 요담의 저주처럼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최후를 맞이합니다. 성도님들 ! 부메랑을 아시지요. 던지면 다시 돌아오는 놀이 기구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부메랑과 같습니다.
진실함을 던지면 구원과 축복으로 돌아옵니다. 불의함을 던지면 저주와 파멸로 돌아옵니다. 오늘 요담의 우화를 통하여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소명을 깨닫고 그 소명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 뜻을 이루는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신 형편과 사정은 다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은사를 받았느냐가 아니라 그 받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깨닫고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이 진정으로 성공한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축복하시는 삶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이와같은 삶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