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22:1-13
제목: 성도의 선택
성도는 오늘을 사는 존재이지만, 성도의 눈은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만 보고 살면 믿음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성도만이 오늘 <믿음의 선택>을 할 수 있다. 성도는 <자신의 상황과 관계없이> 믿음의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보는 성도의 선택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첫째, 현실을 선택하지 않고, 은혜를 선택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3절에 가룟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간 이유가 있다. 그것은 유다가“예수님” 대신에 “현실”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5-6절에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했고, 유다가 허락했다는 말은 돈을 받기로 했다는 것이다. 즉, 돈을 받는 대가로 예수님을 넘겨주는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은혜의 삶>보다, <자기 수중에 돈이 들어오는 현실>을 선택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본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로 선택받는 은혜를 입었다. 게다가 공동체의 재정까지 맡겨주셨다. 은혜이다. 그리고 유다가 입은 은혜 중의 은혜는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 안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탐심(요12:6)이 <은혜를 은혜 아니게 만들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은혜를 누리는 대신 예수님을 은30냥에 팔아넘기는 선택을 하게 된다.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주받을 짓을 했다. 왜인가? 탐심 때문에 <은혜> 대신 <돈이 생기는 현실>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은혜>보다 <돈이 수중에 있는 현실>을 더 나은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고 방심하지 말라. 교회안에서도 우리는 언제든지 은혜 대신에 현실을 선택하는 제2의 가롯유다가 될수 있다.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다. 탐심은 은혜 대신 현실을 선택하게 한다. 사탄이 여러분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현실 대신 은혜를 선택하는 성도가 되라
둘째,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순종을 선택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7-13절은 유월절 음식을 먹을 장소를 준비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주님은 유월절 식사장소를 신비한 방법으로 준비하셨다. 예수님은 그냥 너희가 알아서 준비해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고, 아주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말씀해 주신다. 그리고 13절을 보면 모든 일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어 유월절을 준비하게 된다. 그런데 성경이 이런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본문의 위치가 중요하다. 유월절 준비 앞 부분에는 <유다의 배반 이야기>가 나오고, 유월절 식사 다음 부분에는 <서로 누가 크냐로 다투는 제자들 이야기>가 나온다. 이걸 보면 예수님의 제자사역이 실패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든다. 그런데 7-13절 말씀은 <배반하는 유다, 무능한 제자들>의 모습에 대한 해답을 준다. 주님은 실패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물동이 가지고 가는 사람이 누구냐?>, <그 집 주인이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누구든지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가 가진 소유를 주님을 위해 내어놓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만물의 소유자, 만물의 주권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주권이란 <주인된 권리>를 의미한다. 우리가 보기에 너무나 부족해 보이고 실망스러운 제자들 역시 만물을 통치자이신 주님에 의해 선택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제자선택은 실패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가룟유다를 선택하신 것도 실수가 아니며, 베드로를 선택하신 것도 실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선택되어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는 실수도 없고, 후회하심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으신 전능하신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만물의 통치자이신 주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만물의 주인되신 주님의 말씀에 <믿음과 순종>의 선택을 하는 성도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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